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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한나 Oct 29. 2020

필모그래피의 첫 줄을 적어 넣은  딸에게

'딸들에게 행복한 세상'을 더 이상 외칠 필요가 없는 때를 살기를

어느 날

시험 공부를 하고 있는 줄 알았던 딸아이가

내 방으로 급히 와서 하는 말,

"엄마, 지옥에서 올라온 저건 뭐야,

곧 폭발할 거임?"

분명 한국말이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끓고 있던 흑임자죽이 생각나

부리나케 부엌으로 달려가 불을 껐다.

그리고

지옥에서 올라왔다는 딸아이의 표현 떠올리며

혼자 웃었다.

연 딸아이의 말처럼

흑임자 죽은 그 색깔 하며 모양새가

미니 사이즈 용암 분출의 현장을 만들고 있었기에

너무나 적절한 표현이는 했다.

최근 들어 잦아진 엄마의 깜빡 증세를

살짝 돌려 나무라

무심한 듯 핵심 찔러 지적하기라는

딸아이의 말하기 방식이 재미있다.

이 아이들이 받아들이는 세상은

현실과 게임 공간을 넘나드는 듯한,

일상의 작은 것들도

확장되고 비약적인  상황처럼 표현하 

극적인 요소가 있으면서도

그러나 별거 아니라는

세상 쿨함의 태도를 동시에 가져야 하는

다른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뤄지는 세상이다.

일의 속도는 또 어떠한가!

모든 면에서

나와 딸아이가 살아온 세상의 간격은

허둥거리며 불을 끄는  모습과도 비교되는,

"엄마, 또 태웠어?"를 번역기 돌려

"곧 폭발할 거임? "이라고 말하는

쿨하기 짝이 없는 모습의 간격만큼이나 다른 것 같다.


2018년 5월부터 그해 10월까지

서울 혜화역과 광화문에서 열린

여성들의 '불법 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현장을

기억할 것이다.

당시 홍익대 미술대학 회화과에서 진행된

남성 누드모델의 촬영 사건과 관련하여  

편파수사 논란이 일면서

인터넷으로 급속히 맺어진 여성연대는

약 4만 5천 명이라는 전국의 여성을

단시간에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여성'으로,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분노했다.

당시의 결집이 그야말로 삽시간에 이뤄지는 것을  보면서

그 어떤 연대가  이토록 강력하고도 집중적으로

단 하나의 이슈로 현장에 모일 수 있을까 생각하며 놀랐다.

그 날들의 시위는 훗날

대한민국 여성주의 운동의 흐름에서

꽤 유의미한 움직임으로 해석될 것이다.

이러한 최단시간 현장 결집의 운동의 형태는

오늘의 이 땅 대한민국에서 언제든지

여성과 관련한 다른 이슈와 연결되어

더 확대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할 것이 예상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젊은 여성들의

탈코르셋 운동의 SNS를 통한 급속한 확산은

기존에 암묵적으로 강요되던

꾸밈 노동 거부에 대한

확실한 입장표명을

사회관계망을 통한 자기 인증과

개인의 보여주기 방식으로 참여함으로써

소통의 방식이 기존 세대와 달라진

젊은 여성주의자들의 민첩함을 반영다.

자신의 긴 머리를 숏컷으로 바꾸고

화장품을 폐기하고

노브라의 일상을 실천하고 있음을

직접 미디어를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운동의 현장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뤄지지만

동시에 언제든지 결집 가능한 화력을 소지하고 있다.

지방의 한 여중에서는 속옷 색깔을 규정한 학칙 개정을 위해

그들의 홈그라운드인 SNS를 야무지게 활용하기도 했다.

이 모든 역동이

우리 딸들의 세대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렇게 이들은

82년생 김지영과는 또 다른 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영리하게 소통하고

기민하게 움직인다.

문제의 현장이었던 내 삶의 일상을

다른 이들과의 공통 어젠다 안에서

빠르게 연결하고

즉각 행동한다.


딸아이의 세대는

이렇듯

여성주의의 이슈들이 공론화되기까지

우리 세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스피드로

빠르게 움직인다.

우리 어머니 세대의 여성주의 운동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지적한

그 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각자의 역량의 탁월함에 근거 강인함을 무기로

여성에게 불평등한 환경 개척에 방점을 둔

자립형 여성운동이라고 한다면,

나와 같은 세대의 여성주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제도상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법제를 정비하는 것에 시선을 돌리는

방향의 운동이었다.

호주제 폐지와 여성할당제 등의

제도적 변화가 우리 세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세대인

딸아이 세대의 여성주의 운동은

소통의 실시간이라는 스피드를 저력으로

주저 없는 현장 연결이라는 기민함을

발휘하는 놀라운 세대다.

어쩌면 지난 세월 오래도록 해결되지 않던

여성주의 운동의 많은 주제들이

딸아이의 세대를 통해

한 번에 해결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가끔 설렌다.


'다시 쓰는 열일곱'이라는

생애 첫 영화를

동아리 친구들과 만든 딸아이가

포스터를 만들 때도

예고편을 만들 때도

자랑하듯

실시간 엄마의 감상평을

카톡으로 물어본다.

그 어쩔 줄 모르는 기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지되,

'여성 영화감독'이 아닌

'감독'이라는 무성의 워딩으로 불려질 때가

네 때에는 오기를 바란다.

그러니 네 엄마처럼

딸이라는 이름 앞

여기저기 가로 놓였던 장벽 앞에

울고만 있지 말고

거침없이

그 장벽을 훌쩍 넘어 버리거라.

그렇게

딸들이 행복한 세상을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때를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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