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에서 청산하고 풀어야할 숙제들이 많다. 망언을 일삼는 일본정치인이나 정부의 끄나풀인 어용학자들의 억지주장은 정말 역겹다. 난 그들의 망언을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들이 다시는 그런 소리를 못하도록 자료를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다. 난 한일역사관련 취재로 한국인보다 더 한일역사문제를 고민하고 일본정부의 만행을 밝혀 일본인들에게 알리고자 노력하는 일본의 양심학자들과 시민들을 만날때마다 그들이 존경스러웠고 내공이 부족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난 M본부와 독도취재를 9년간 함께하고 있다. 6번째 테마는 고지도였다. 제작진은 독도를 노리는 일본의 야욕에 대응할 열쇠로 일본이 독도의 영유권에 관심을 가지기 이전의 고지도에 주목했다. 특히 일본에서 제작된 고지도에서 독도를 한국령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은 일본의 독도영유권주장을 그들 스스로 반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독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세계의 고지도를 통해 1920년대까지 울릉도와 독도를 모자(母子)섬으로 묶어서 보는 것이 보편적이고 공통적인 인식이었음을 밝힐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독도의 증언>에서는 일본과 서양의 방대한 고지도를 분류하고 분석해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굴함과 동시에 독도에 대한 일본측 주장의 모순을 철저하게 밝히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독도영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논리를 강화하고자 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본에서 독도관련 지도분야는 쿠보이 노리오선생(전 모모야마학원대학 비상근강사, 타케시마-독도문제의 해결 저자)이 권위자다. 취재팀은 일본 외무성이 자신있게 내놓은 지도, 개정일본여지노정전도(1846년도판)의 원본을 메이지대학에서 확인했 지만, 쿠보이선생은 그 지도는 민간이 만든 해적판임을 밝혀냈다.
일본에서 최초로 위도와 경도를 도입한 나가쿠보 세키스이(1717년-1801년)는 현재도 일본지도의 선구학자로 추앙받는다. 그는 당시 일본의 국경을 명확하게 구분하고자 지도를 만들었다. 그의 지도는 정확성을 인정받아 1779년부터 에도막부의 공식허가를 받아 관허지도가 되었다. 그후 1840년까지 총 5판의 관허지도가 제작되었는데 일본외무성이 주장하는 1846년지도는 에도막부의 관허표시가 없어 공식지도라고 볼수 없다. 1779년 지도는 막부관허표시가 있고 울릉도와 독도가 무채색으로 표시되어 일본영토와 구분되어 있다. 1840년에 제작된 마지막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사라지고 없다.
그 역사적 배경은 조선의 어부인 안용복이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선언한 후, 1686년 일본정부는 자국 어부들에게 울릉도도해금지령을 내렸다. 하지만 도해금지령을 어기고 1836년 하치에몬이 죽도(당시 울릉도)에 도해하여 사형에 처혀졌다. 이계기로 에도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땅이 아님을 확실히 하기위해 1840년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를 삭제한 것이다. 쿠보이선생이 아니였다면 우린 일본의 논리에 농락당했을지 모른다. 정말 귀중한 연구이자 자료다.
1990년 재일교포인 한 여성이 식민지시대 억울하게 희생된 강제징용자의 위령탑을 세우자는 신문투고를 계기로 일본과 한국교류의 역사를 알리는 고려박물관이 탄생되었다. 당시 재일교포는 남한쪽 사람과 북한쪽 사람의 대립이 심해서 한국과 조선을 하나로 표현할수 있는 “고려”를 사용하여 이름을 고려박물관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들은 일본과 코리아(한국과 조선) 상호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며 이해하고 우호를 깊게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두차례 침략과 근대식민지지배의 죄책을 반성하고, 재일조선인의 생활과 권리의 확립을 바라며 재일한국과 조선인의 교유역사와 문화를 알리며 민족 차별없는 공생사회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700여명의 회원이 낸 연회비 5천엔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사장을 포함하여 회원 80%가 일본인이며 모두 자원봉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9년 Y본부 “3.1운동 100주년” 관련 다큐멘터리를 맡았다. 이 프로그램은 3.1운동의 시작을 알렸던 기미독립선언서를 주목했다. 이는 일반인들의 통념과는 달리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나 무력투쟁을 선동하는 내용이 전혀없다. 그 대신 일본에 대한 존엄함 꾸짖음과 시대를 앞선 인류공존과 평화, 민본의 정신이 고스라인 드러나 있다. 지금의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이 추구해야할 방향이 100년전 이 선언에 너무도 명확히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해자인 일본인과 피해자인 한국인에게 오날날의 3.1정신은 과연 무엇인지, 3.1운동 100주년의 의미와 한일양국의 화해가능성을 짚어보았다.
12년동안 일본에 살면서 고려박물관을 처음 방문했다. 회원들이 삼삼오오모여 일본인들에게 3.1운동을 알리기 위한 전시회 준비가 한창이였다. 한국사람들과 교류를 통해 모은 귀중한 자료, 고대한일관계, 3.1운동과정과 당시 신문보도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 회원은 당시 한국에서 신문발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일본에서 3.1운동이 어떻게 보도되었는지를 조사했다. 한달간 일본 국회도서관에 가서 마이크로필름을 꼼꼼히 살피며 발견한 귀중한 정보는 충격적이였다. 3.1운동에 대해 하세가와총독은 "무지한 조신민중이 유언비어를 믿고 경거망동", "물지각한 조선인들의 폭동"으로 보도된 기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내가 모르는 정보가 가득했고 낯이 뜨거웠다.
한때 이사장을 맡았던 하라다상은 아버지가 예전에 압록강에서 댐건설현장 업무를 했는데, 3.1운동을 알게되면서 아버지도 가혹한 식민지 지배의 일원이 아니였나 싶어 한국인에게 사죄해야한다는 마음에서 이번 전시회를 준비했다고 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이웃나라에 해서는 안되는 끔직한 일을 저지른 일본의 만행을 반성하고 많은 일본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1990년대 한국에 살았던 아오야기상은 3.1운동 100년동안의 민주화운동을 정리했다. 일본역사에서는 민중이 중심이 되어 역사를 바꾼적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3.1운동과 촛불혁명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일본사회가 전혀 바뀌지 않는 점에 대해 한숨을 쉬면서 한국의 촛불혁명에서 배워야한다고 했다. 한국인보다 더 생각하고 일본인들의 만행에 대해 반성하며 그걸 숨기지 않고 일본인들에게 알려야한다는 그들의 사명감에 머리가 숙여졌다.
이 분야에 광폭적으로 활동하시는 분이 우츠미 아이코교수(케이센죠가쿠인대학 명예교수이자 역사사회학자)다. 그녀는 1982년 감옥살이를 하고 살아남은 조선인BC급 전범들의 생생한 증언과 일본의 각종 비밀문서와 재판기록을 파헤쳐서 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이중피해자임을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으로 일본에 널리알렸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한국사회에 뜨거운 관심을 받았지만, 2006년이 되어서야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해 한국정부로부터 그들이 BC급 전범이 아닌 강제동원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 받았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는 인도네시아 독립영웅 야나가와 시치세이의 인물이 조선인 양칠성임을 밝혀냈다. 1945년 8월 일본 패망으로 태평양전쟁이 종결됐지만, 남방에 파견된 일본군 중 일부는 귀환하지 않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한다. 1975년 11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게릴라부대 <팡그란 파팍>의 일원으로 독립전쟁에 가담한 일본인 3명을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서하고, 그들의 주검을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그러나 그들 중의 한명 야나가와 시치세이는 일본인이 아니였다. 전북 완주군 삼례 출신 조선인 양칠성이 그의 본명이다.국적을 떠나 전쟁에 희생된 영혼을 두번죽인 일본정부의 만행을 일본국민의 한명으로 만천하에 알렸다. 그녀가 없었다면, 양칠성은 영원히 해방되지 못한채 저승에서 떠돌아 다녔을지 모른다.
여러분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희생된 한국인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나요? 전체 희생자 74만명 중, 10%가 한국인 피해자라고 한다. T본부는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자 나가사키에 있는“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岡まさはる記念長崎平和資料館”을 방문했다. 회원이자 자원봉사자로 활동중인 키무라상은 유창한 한국어로 취재팀을 안내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전쟁의 피해자라는 의식이 강하지만, 부끄럽게도 가해자 입장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만든 나가카시원폭자료관에는 한국인 피폭자에 대한 자료가 일부 있으나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그래서 1995년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외국인들을 위해 일본의 가해책임을 고발한 목사였던 오카 마사하루상이 이 단체를 설립하였고, 그들은 일본인이 가해자측면에서 한국인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있다고 했다. 이 단체는 2017년 합천에 국내최초로 원폭자료관이 개관된 것보다 22년 앞서서 활동하고 있다. 그들의 지극정성에 눈물이 났다.
평화지원활동센터의 센터장인 히로노상은 피폭2세로 일본의 피해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역사에 눈을 돌려 재일한국인 피폭자를 전폭 지원하고 있다. 그는 28년간 나가사키현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나가사키현의 피폭2세 교직원모임을 시작으로 재일한국인 피폭자와 한국의 원폭피해자를 지원하는 시민모임을 이끌어가고 있다. 핵무기폐기를 위한 고등학생 1만명 서명운동을 이 지역의 고등학생들과 함께 한다. 한국에도 여러차례 방문하여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을 증언을 기록하고 그분들을 일본으로 데리고와서 치료와 보상에 관련된 다양한 업무를 지원하고 있다. 한국인보다 더 열정적으로 봉사활동하시는 그가 존경스러웠다.
일본 사회에서 그들의 작은 움직임은 한국의 방송소재로 안성만춤이지만, 일본에서는 가시같은 존재다. 한번의 방송으로 모든 국민이 다 파악알수 없다. 진정한 반성없는 일본의 정치가들과 우익들이 득실거리지만 이런 양심있고 진정한 반성을 하고 있는 일본학자와 시민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우리도 외면하지 말고 관심 더 가져야며 자신이 할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적극 동참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