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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싹지기 Mar 04. 2024

가슴 시린 사랑의 기억

박인환 시인의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가을은 내 가슴이 동경하던 무엇인가를 샘솟게 하는 계절이다.


우리들의 대학 시절에는 낭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머리는 논리를 따르지만, 가슴은 항상 '멋이 있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갈구한다. 스스로 멋있지는 않아도 멋있는 것에 대한 동경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꼈던 시절이었다.


나의 학창 시절, 머릿속에서는 김수영 시인과 신동엽 시인을 무척이나 좋아하게 된 시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들의 시를 좋아하지만 그 시절에 그들의 시에서 느낀 뜨거운 느낌은 남달랐다. 80년대 암울했다고 생각했던 시대의 이미지가 그러했으니 당연히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대학생의 이성에서는 민족이라는 것, 이 사회의 척박한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관심사들을 우선시하다 보니 당연히 강단지게 그런 생각들을 실천해 나가고 작품으로 그려내는 이들이 좋아 보였다. 이념의 대립이 험악하게 전개되던 그 시대에는 낭만이니 멋이니, 순수 예술이니 하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 무책임하게 보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막연하고 맥없어 보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도 가슴 한 곁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동경을 하던 이가 있었다. 남자의 눈에도 참 멋있어 보이던 남자, 박인환 시인이었다. 그에 대한 동경은 평전 속에서 보게 되던 그의 사진 속에 담긴 출중한 외모나 혹은 멋스러워 보이던 그의 일화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시를 읽으면서도 나의 이성은 왠지 그의 시구가 그 당시 대학생이면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냉철한 이성과는 동떨어져서, 왠지 맥이 없다고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시구가 남겨주는 멋스러운 여운이 가슴속에서는 잔잔하면서도 짜릿한 감동이 되어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이성으로 억누르기는 쉽지가 않았다.


시화나 책받침에 가장 흔하게 유명세를 타고 있던 그의 시 '목마와 숙녀'는 그 시의 유명세만큼이나 멋들어진 시구를 담고 있다. 시인은 어떻게 저런 단어들을 조합하고 생각을 할까 하는 의문을 처음 가지게 만든 것이 그 시였다. 그의 멋에 끌려서 그의 평전을 읽게 되었다. 그의 삶은 어떠했을까 하는 의문보다는 그의 삶의 순간순간에 풍겨주던 낭만이 평전 한 권을 다 읽게 만들었다. 그의 삶의 순간순간에서 강렬한 끌림을 느끼면서 생각을 했다. 낭만적인 삶이라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평전에서 그의 짧은 삶의 순간들을 음미하면서 어쩌면 그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멋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에는 가슴이 시렸다. 시도 좋고 외모도 훤칠한데 어쩌다가 이 사람은 이렇게 일찍 세상을 뜨게 되었는가 싶은 생각은 한동안 내 가슴을 그리도 시리게 만들었다.


시인 박인환


세월이 흘러도 그의 시는 노래가 되어 가을 속에 남아 있다.


가장 유명했던 그의 시 '목마와 숙녀'는 책받침이나 액자 같은 시화를 통해서 가장 많이 알려졌고, 박인희의 목소리로 녹음된 시낭송으로만 오랫동안 인기를 지속해 왔다. 노래로 남아서 많은 이들의 목소리로 다시 퍼져나간 가을 노래는 역시 '세월이 가면'이다.


'세월이 가면'이 만들어진 일화는 EBS에서 제작한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에 잘 그려져 있다. 물론 이 일화는 여러 사람의 기억에서 약간은 다른 내용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드라마 '명동백작'의 주인공인 소설가 이봉구의 회고록을 기본으로 일화를 정리하면서 몇 가지 다른 설도 함께 비교해 보자.

참고로 드라마 '명동백작'은 명동백작 이봉구와 그의 친구 김수영, 박인환 등 3명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956년 3월의 어느 날, 명동의 막걸릿집인 '은성'에서는 박인환과 작곡가 이진섭, 소설가 송지영, 가수 나애심이 모였다. '은성'은 1986년 작고한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 이명숙 님이 영화제작자로 활동했던 최불암의 아버지가 작고하자 생계를 위해 운영했다고 전해지는 곳이고, 당시 문인들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했던 곳 중의 하나였다. 강계순이 쓴 박인환 평전 '아! 박인환'과 소설가 강홍규의 칼럼 '관철동시대'에서는 이곳이 '은성'이 아니고 '경상도집'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진섭이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했는데, 마침 박인환이 그 자리에서 쓰고 있던 시에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였다. 나애심이 그 곡을 처음으로 불러보았고 이후 송지영과 함께 자리를 떠났고, 그 뒤에 소설가 이봉구와 테너 임만섭이 합류했다. 임만섭은 그 악보를 보고서 노래를 불러보았고, 그 노래를 듣고 모여든 명동의 행인들이 앙코르를 청해서 다시 한번 '세월이 가면'을 불렀다고 한다. 소설가 이봉구의 회고는 이렇지만, 드라마 '명동백작'에서는 박인환, 이진섭, 나애심과 함께 시인 조병화가 함께 했고, 조병화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해서 마침 무언가 시를 쓰고 있던 박인환의 가사에 이진섭이 그 자리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노래를 부른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박인환이 이 시를 쓰게 된 배경에도 다른 설이 있다. 하나는 이 시를 쓰기 전 날에 박인환이 그의 첫사랑이 묻혀있는 망우리묘지를 10년 만에 다녀왔다고 하는데, 그 스스로가 그의 마지막을 예견이라도 한 듯이 삶을 정리하면서 그의 삶 속에 담긴 추억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온 시가 '세월이 가면'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시는 그의 유작시가 되었다. 또 다른 설은 이 시가 밀린 외상값 독촉에 밀려서 '은성' 주인의 과거에 얽힌 감정을 시로 표현해 준 것이고, 더불어 이 곡을 처음 부른 이가 가까운 곳에서 술을 마시던 '현인'이었다는 설이다.


'세월이 가면'의 탄생 일화에 약간의 다른 설이 있지만, 박인환이 즉석에서 쓴 시에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나애심이 처음으로 노래를 부른, 가장 중요한 맥락은 동일하게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나애심에 의해서 그해, 1956년에 처음으로 음반으로 취입이 되었다.


박인환은 이로부터 약 일주일 정도 지난 1956년 3월 20일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장 좋아하던 시인 이상의 기일이 되면 폭음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 해에도 그가 이상의 기일이라고 착각했던 3월 17일(실제로는 4월 17일)부터 3일간 폭음을 하고 만취된 상태에서 집에 와서 잠을 자다가 저녁 9시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미망인의 양해를 얻어 망우리묘지의 첫사랑 묘 옆에 나란히 묻혔다고 하고, 무덤 속에 그가 평소에 좋아했던 조니워커와 카멜 담배를 넣어주었다고 한다.  


EBS 드라마 '명동백작'의 한 장면. 박인환이 쓴 가사에 이진섭이 곡을 붙이고 있다.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명작이 되다.


박인환의 시 '세월이 가면'은 이 시가 나온 1956년에 나애심의 목소리로 첫 음반이 나온 후에 1957년에 현인의 목소리로 다시 음반이 나온다. 그 이후에는 1976년에 박인희가 다시 불러 그 곡으로 방송을 타면서 크게 알려지게 된다.


나애심은 1930년생으로 1953년에 '밤의 탱고'로 데뷔했고, 1956년에 '백치 아다다'를 불러 유명세를 탔었는데, 그 해에 '세월이 가면'을 노래하게 되었다. 이외에 대표곡으로는 '미사의 종', '과거를 묻지 마세요' 등이 있고, 가요무대를 통해서 간간이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주다가 2017년에 노환으로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수 김혜림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듬해인 1957년에는 현인이 이 노래를 취입했다.




박인희는 1976년에 이 노래를 발표했다.

세대에 따라서 느낌은 다르겠지만, 가장 많은 방송을 탄 것은 박인희가 리메이커한 '세월이 가면'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최근에 가장 인기를 끈 버전은 1984년에 이동원이 그의 앨범 '이별노래'에 수록한 '세월이 가면'이다.




이외에도 최백호, 조용필, 적우 등 많은 가수들의 목소리로 들어볼 수 있다.






대학시절, 박인환 평전을 읽으면서 가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라고 생각했던 시인 박인환, 별로 내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낭만적인 감성을 뿜어주는 시구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 사람이다. 그의 시로 만들어진 노래 '세월이 가면'을 들으면 가을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가을, 그의 시구는 왜 그리 가슴을 짠하게 만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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