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t Metheny & Charlie Haden의 Spiritual
그 여행은 원래 내 것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주어졌던 짧은 미국 교육의 기회는 내가 우리 부서의 직원에게 제시한 기회였다. 물론 내 속마음으로는 나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열흘 이상을 사무실을 비운다는 것이 그 당시의 내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일이 너무 많았다. 부서장이 된 후에 매일매일 나를 억누르던 그 많았던 일들을 두고서 교육을 다녀온다는 것은 상상을 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미국...
아주 오래전에 내가 생애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처음 타게 되었던 그때, 첫 여행지로 시카고로의 재즈 여행을 생각한 적도 있긴 했다. 하지만 결국 나의 마지막 결정은 런던이었다. 친구가 유학을 가 있던 곳이었다. 놀러 오라는 친구의 재촉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싫어하는 편이었다. 굳이 미국 같은 큰 나라를 여행 갈 필요가 무어 있겠냐는 자존심도 발동을 했다. 비자를 내는 과정이 마치 허락을 받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를 미국으로 가는 여행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굳이 허락을 받아가면서까지 그런 나라를 갈 필요가 무어 있겠냐는 자존심이 미국으로의 여행을 쉽게 포기하게 만들었다. 미국 여행을 잠시 생각했던 것은 우연히 본 어느 신문사의 재즈여행 패키지 때문이었고, 재즈를 들으러 본토에 가는 여행이라는 것이 매력을 느끼게 한 정도였다. 포기는 아주 쉬웠다.
이후에 다시 미국으로 여행을 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의 기회는 내게 완전히 주어진 기회는 아니었다. 단지 미국으로의 교육 여행을 도전할 수 있는 기회 정도였다. 공기업의 사무직에게는 아주 드문 기회로 미국으로의 단기교육 프로그램이 생겨서 신청을 했다. 그런데 어이없는 이유로 낙방을 했다. 지난 10년간 내가 회사에서 했던 업무와 관련이 있는 교육이었고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문가 중의 하나라고 자부를 하고 있었다. 내가 잠시 타의에 의해서 그 일을 떠나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하고 있던 것이 내 발목을 잡았다. 회사에서 내건 내 낙방의 핑계는 현재 그 일을 하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이없었지만...
정작 나를 화나게 한 것은 내가 낙방한 그 교육을 회사에서 일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는, 정말 신기한 종류의 인간 중의 하나였던 그 상사가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인간, 내가 부서를 옮기기 바로 전에 함께 일을 했던 이였다. 엄밀히 따지면 함께 일을 한 건 아니지. 그 인간은 정말 일을 안 하는 인간이었으니, 그냥 같은 부서에 있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회사에서 저렇게 일을 안 하는 데에도 월급을 주는구나 싶은 생각을 들게 한 이었고, 나는 그게 정말 신기했다. 하루 종일 코딱지나 파고 않아 있는 모습이 그리도 보기 싫은 이였다. 그런데 그이가 나를 낙방시킨 교육에 선발된 이라고 화가 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이라고는 이런 것 밖에 없었다. '이런 교육이라면 앞으로 회사에서 보내주는 교육은 절대로 안 가겠다.'라는 정도...
그 결심을 오랫동안 지켰다. 철저하게 나는 회사의 교육 기회에 지원하지 않았고, 여행을 가고 싶으면 그냥 나 스스로 해결했다. 그러다가 온 기회가 내가 부서장이 되었던 시절에 일이 힘든 부서의 특전 같은 교육 하나가 있었는데 내게 순서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나의 결심을 지키려는 생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음 순서의 직원에게 그 기회를 넘겼다. 하지만, 그 직원에게 해외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내 결재서류를 나의 직상위자인 처장이 반려했다. 그 직원은 교육을 갈만한 재목이 못되니 나에게 교육을 다녀오라고 했다. 일이 많아서 안된다, 그 직원도 성질은 안 좋지만, 일은 나름 잘한다, 이런 설명을 붙였지만 처장의 생각은 단호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사실은 아주 감사하게 그 '명령'을 받아들였다. 타의에 의해서, 회사의 명에 의해서 가게 된 것이니 적어도 해외교육에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지켰다는 마음속의 변명을 끝으로 나는 급히 여행 가방을 챙겼다. 그렇게 가게 된 미주리로의 여행이었다.
그렇게 가게 된 미주리로의 여행이었다. 교육이라고는 하지만 교육을 좋아하는 내게는 이렇게 멀리 가는 교육은 여행이나 다름없었다. 긴 비행시간도 즐기던 때였고, 새로운 곳에 도착하는 그 기분을 너무 좋아했던 때였다. 그래서 주로 미주리대학교와 그 주변에서 전문가들의 특강을 하루 8시간 정도 듣던 그 교육은 내 맘에 쏙 들었다.
첫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이튿날에는 미주리대학교 캠퍼스에서 가졌던 교육을 마치고 환영 만찬을 해주었다. 아직은 낯선 곳에서 지리 감각이 오지 않아서 어디인지도 모를 외곽의 레스토랑에서였다. 만찬을 하기 위해 도착한 주차장에서 문득 미주리의 하늘이 보였다. 사진을 한 장 찍고서 잠시 더 쳐다보는데 문득 Pat Metheny의 'Beyond Missouri Sky'라는 앨범 제목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이 앨범의 재킷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었다. 도대체 미주리의 하늘 위에는 뭐가 있길래...
글쎄, 직접 보면서도 잘 모르겠긴 했지만, 미주리의 하늘은 유난히 푸르렀다는 생각은 들었다. 묘한 느낌을 주는 그런 하늘이었다. 여기라고 별다른 것이 있겠나 싶지만, 그냥 하늘의 색깔이 참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구름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오랫동안 감상을 했다. 그 자리에서는 가장 잘 듣던 Cinema Paradiso의 테마 두 곡이 떠올랐지만 돌아와서 다시 찬찬히 들어보니 이 곡이 가장 그 하늘에 잘 어울린다.
요즘은 이 앨범 재킷을 보면 거꾸로 그 시절의 좋았던 교육 여행의 순간을 떠올린다. 내 회사 시절의 말미 중에 좋았던 기억의 하나였던 미주리와 시카고에서의 열흘이 참 좋았다. 더 좋았던 것은 내가 좋아하던 후배 둘도 그 교육에 함께 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얼굴도 함께 떠올린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 여행에서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 셋을 꼽으라면, 아미쉬 마을에 가본 것, 저녁시간에 시카고의 재즈클럽에 들러서 저녁식사를 한 것 그리고 땅이 넓은 미국 원전의 입지를 확인해 본것이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아미쉬 교도들의 문명을 거부하는 삶의 모습과 말로만 듣던 시카고의 재즈클럽에서 클럽 밴드의 연주를 들은 것은 작정하고 가려면 큰 작정을 해야하는데 교육 기간 중에 함께 짜여진 쉼의 시간 동안에 주어진 체험으로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다. 미국의 원전은 인구가 조밀한 우리나라의 모습과 너무나 달리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원전에서 일을 했던 나였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원전이라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준 기회였다. 참 잘 준비된 교육 프로그램이어서 현장에서 실제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여러번 느끼게 해 준 열흘간이었다.
Spiritual (Pat Metheny & Charlie Ha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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