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자정이 훌쩍 지난 시간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다 깬 엄마가 놀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나는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엄마는 '그래도 집에는 들어가야지' 하면서 나를 달랬다. 그때 옆에서 전화내용을 듣던 아빠가 버럭 화를 냈다. 당장 짐을 싸서 내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훗날 얘기를 나눠보니 아빠는 다른 것보다 내 딸을새벽시간 길거리에 앉아있게 만든 걸용납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때부터 나도 아차 싶어서 일단 남편과 대화를 해보겠다 말하고 끊었다. 그렇지만 연락도 없는 그에게 굽히며 집에 들어가긴 싫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오늘은 광화문에서 버티겠다 다짐했다.
이 시간에생각나는 친구가 딱 1명 있었다. 역시나 친구는 한 번에 전화를 받아주었고, 대중교통이 끊긴 시간에 택시를 타고 한달음에 나를 찾아왔다. 그날 하루종일 굶다가 마신 녹차라떼의 쌉싸름한 맛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 정도 이성적 사고가 가능해졌다. 그제야 친구에게 늦은 시간에 불러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어차피 밖에 있다가 이제 들어가는 길이었어."
늦은 시간까지 뭐하고 있었냐고 묻는데 친구의 표정이 난감해 보였다.
"왜 하필 오늘이 내 생일이어서···."
살다보면 그런 날이 있다. 꿈이라면 얼른 깨고 싶은, 그만큼 비현실적인 날이었다. 시어머니의 첫 생일과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던 친구의 생일을 동시에 놓친 날. 하필 시어머니의 음력생일과 친구의 양력생일이 딱 겹친 날.친구는 본인이 생일인 걸오히려 나에게 미안해했다. 시어머니 생신도 늦게 챙겨, 생일인 친구를 이런 일로불러내, 이쯤 되니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가 문제인 거 같았다. 서서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내 앞길은 캄캄했지만 출근은 해야 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들어간 신혼집은 어떤 날보다 고요했다. 누가 온지도 모른 채 침대에서 자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이 문제는 시어머니와의 갈등을 넘어 남편과의 싸움으로 이어졌다.
서로 대화 하나 오가지 않던 냉전 중, 남편의 휴대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무음으로 바꾸려고 열었을 뿐인데 시어머니의 카톡이 미리보기로 보였다. 그렇게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 카톡방에서 남편은 마치 시어머니와 한 편인 것처럼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꼭지가 돈다는 게 뭔지 그날 몸소 깨달았다. 파혼을 운운할 때 내가 유일하게 한 부탁이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을 우선적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남편은 무슨 말을 하냐며 끝까지 발뺌했고 카톡방을 나간 건지 그 내용은 다시 볼 수 없었다. 나는 결혼반지를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고 출근을 했다. 어딜 올려놔도 잘 안 보일 거 같아서 선택한 게 프라이팬이었다. 오늘 퇴근하면 아빠 말대로 친정집에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반지를 본 남편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화를 해왔다. 결국 남편이 먼저 사과를 했다. 엎드려 절 받기 수준이었지만 이 이상 싸우면 돌이킬 수 없을 거 같았다. 나도 시어머니에게 다시 사과를 하는 걸로 타협을 봤다. 드디어 시어머니와 전화연결이 되었다. 다른 변명 없이 그냥 죄송하다고만 말했다. 그 짧은 사과 한 마디에 시어머니가 펑펑 우셨다. 내가 본인을 무시한 거 같았다고 했다. 아니라고 해명하면서 나도 펑펑 울었다. 솔직히 서로에게 미안하다거나 서로를 이해한다는, 그런 아름다운 화해의 눈물은 아니었던 거 같다. 다만 앞으로 어떤 부분을 조심해야 할지 상대방을 파악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날 이후부터 집안 대소사를 구글 캘린더에 1년 주기로 반복되도록 설정해 놓았다. 살다 보니 남편네도 우리집처럼 생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첫 생일이라는 게 의미가 남달랐을 뿐. 작년부터 시어머니는 내 생일을 잊고 있다가 뒤늦게 축하를 해주신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나는 아무렇지 않다. 그래도 서로 겪었던 사건이 있다 보니 '내가 음력생일에 익숙해서 양력은 자꾸 까먹게 되네' 하면서 유난히 미안해하신다.
그해 11월, 엄마는 본인 생일을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선물도 축하도 받지 않겠다는 완강한 태도였다. 아빠는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발생하면 남편의 얼굴을 다신 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꽤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었다. 내가 SNS와 카카오톡 생일 알림을 숨김처리한 것도 그 시점부터였다. 가까운 지인들에게는 서로의생일날 만날 수 있으면 밥을 같이 먹는정도로만 축하를 하고 더는형식적으로 챙기지 말자고 이야기를 했다. 요즘은 생일이 다가와도 더는 마음이 불편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