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할아버지의 제사를 매년 지내고 있다. 명절 2번과 제삿날 1번, 1년마다 3번의 상을 차려야 했다. 막내딸인 고모는 본인 아빠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랐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쭉 혼자였다. 명절이 되면 15평 남짓한 할머니집에 10명이 넘는 가족들이 모였다. 좁은 공간 탓에 방 2개에 인원을 나눠 앉아야 했다. 할머니와 며느리 둘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음식을 할 때만큼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하루종일 뜨거운 불 앞에서 씨름을 하는데 비해 차례를 지내는 시간은 10분도 채 되지 않았다. 상에 음식을 올리는 시간보다도 짧았다. 명절을 떠올릴 때 행복했던 기억은 다같이 잠깐 나가 낚시를 하거나 볼링을 칠 때였다. 그마저도 요리를 하는 며느리들은 나가지 못했다. 우리가 놀다 들어오면 엄마와 숙모가 방구석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명절이 되면 집성촌으로 향했다. 경북 예천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그곳에 다양한 촌수의 친척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의 위치는 누구네 작은 집의 장남이었다. 그 말은 곧 시어머니가 맏며느리, 남편은 장손 고로 나는 장손 며느리가 되어있었다. 며느리야 두 분이나 더 있었지만 손주 며느리는 나 혼자였다. 결혼 후 맞이하는 첫 명절이니 한복을 챙겨 오라고 했다.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종갓집 풍경이 그려졌다.
나는 친가, 외가가 모두 도심이라 이런 시골은 난생처음이었다. 슈퍼마켓도 차로 15분을 가야 했고, 카페 같은 곳은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마을입구까진 도로가 잘 닦여있는데 집까지 들어가려면 좁은 외길을 지나야 했다. 남편이 말하길, 옛날에 코너를 돌다 두렁에 빠진 적도 있었다고 했다. 여기 어르신들 대부분은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주수입원은 농사와 축산업이다. 시할아버지와 시할머니는 소를 돌봐야 해서 1박의 여행조차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동네를 걸으며 만나게 되는 어른들에게 무조건 인사를 해야 했다. 남편도 누군지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누구 집, 몇 째입니다'만 말하면 모든 게 통했다.
맏며느리인 시어머니는 명절이 다가오면 며칠 전부터 분주했다. 일단 생선, 과일, 고기 등 좋은 식재료를 구하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동서 둘이 맞벌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대부분의 일을 시어머니가 혼자 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쉬어도 눈치가 보일 테니 일을 돕는 건 좋았다. 문제는 할 줄 아는 게 딱히 없었다. 첫 미션이 가래떡을 떡국떡 모양으로 써는 거였다. 신사임당은 눈을 감고도 떡을 썰었다는데 나는 눈을 뜨고 써는데도 두께가 제각각이었다. 말랑한 떡을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딱딱해서 얼마 썰지도 않았는데 손아귀가 아파왔다. 두 번째로 만두를 빚었다. 간단해 보이는 일도 손재주가 없으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날 다같이 떡국을 먹으면서 "이거 손부가 만든 거 아니야?"라고 물어볼 정도로 내가 빚은 만두만 모양이 특이했다.
시어머니는 요리를 비롯해 나에게 살림살이를 알려줄 때 유난히 즐거워보였다.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던 시어머니의 과거모습이 얼핏 보였다. 내가 간단한 일에도 허덕이고 있는 사이, 시어머니는 튀김, 동그랑땡, 산적, 탕국, 나물 등 동시에 많은 요리를 끝냈다. '맏며느리는 이런 분을 가리키면서 하는 말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들은 모여 앉아 집안의 대소사부터 정치, 경제분야 등의 이야기를 하며 하루종일 떠들기 바빴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며 근처에 앉아있었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뭘 도우려고 하면 어른들이 운전하고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쉬라며 손에 든 것을 빼앗았다. 오전부터 시작한 일은 저녁시간이 지나서야 끝났다. 몸에서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밤 10시가 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졌다.
새벽 5시, 눈이 번쩍 떠졌다. 바닥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연탄보일러라더니 온도조절이 잘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일어난 김에 오래 걸리는 한복부터 주섬주섬 입었다. 어쩌다 보니 한복을 입고 아침 문안인사를 올리는 예의 바른 손주 며느리가 되어 있었다. 집성촌이라도 온마을 사람들이 서로의 집을 돌며 차례를 지내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촌수가 가까운 가족들끼리 서로 집을 오가며 차례를 지냈다. 차례를 지내는 시간이 되자 여자들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앉았다. 나는 조상들께 첫 인사를 올린다는 명목으로 남편과 같이 절을 했다. 옛날에는 인원이 훨씬 더 많아 마당에서 차례를 지냈다고 했다. 차례상을 먹을 때도 남녀가 따로 앉아서 밥을 먹었다.
이제 다 끝난 건가 싶은 순간, 마을 내 스피커가 울렸다. 마을회관에서 합동절을 올린다고 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와있었는지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신발 벗을 자리조차 없었다. 겨우 들어간 실내도 사람으로 가득했다. 그중에 한복을 입은 사람은 우리부부뿐이었다.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마을 내 가장 어르신들 앞에 절을 올렸다. 오늘 처음 본 사이였지만 '누구네 손주 며느리'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마치 오늘 떠날 마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나만 좌불안석이었다. 명절연휴는 짧고 나도 가족이 보고 싶은데 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그때 휴대폰 액정에 '어무니♥'란 이름이 떴다.
"우리 딸, 잘하고 있어?"
"힘든 일은 없었고?"
"엄마, 아빠는 쉬고 있으면 되니까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와"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목이 메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가 힘들다고, 대학생 땐 용돈이 부족하다고, 서울로 올라가서는 일이 힘들다고 항상 징징거렸는데 이제는 결혼해서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고 있다. 여기저기 인사를 더 올린 뒤 시부모님이 늦기 전에 친정으로 가보라고 했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저녁시간이 지나서야우리집에 도착을 했다. 이미 저녁을 먹은 부모님이 다시 밥상을 차렸다. 음식을 옮기는 거라도 도우려는데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했다. 우리집을 이제 친정집이라 불러야 하는 것도 손님대접받듯 앉아있는 것도 모든 게 낯선 첫 명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