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몸살을 자주 앓았다. 마치 월례행사처럼 아팠다. 처음에는 동네병원도 종종 갔는데 별다른 처방이 없다 보니 그때부터 약국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약국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는 몸살약과 한방약의 얼리 어답터였다. 남편이 걱정되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 상황이 오래 반복되다 보니 '또?'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건 남편은 매번 본인이 아플 거라는 걸 미리 알아챘다. 재밌게 놀고 있다가도 '아, 나 곧 몸살 올 거 같은데?'라고 말하면 정말 곧 몸살이 났다. 그리고 약 몇 알을 섭취 후 '오늘만 쉬면 나을 거 같아' 이렇게 말하고는 잠들었고, 정말 다음날 기운을 차렸다. 그 흔한 감기 한 번 잘 안 걸리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극외향인인 남편은 새 아파트로 이사하자마자 집들이부터 시작했다. 빌라에 살 때는 좁아서 4명 이상의 손님을 부르지 못했다. 그때의 한을 풀듯 첫 집들이에 6명의 지인을 초대했다. 남편의 부산 친구들이었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이니 잘 대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었다. 나는 치즈대하구이, 관자구이, 밀푀유나베, 감바스 등 평소 해본 적도 없는 메뉴들을 준비했다. 요리에 대한 의욕이 앞서 밀키트 대신 각각의 재료를 모두 샀다. 집들이 당일, 저녁 6시에 오는 손님들을 위해 오전 11시부터 음식을 준비했다. 그때 나를 보조하기로 한 남편이 '나 몸살 난 거 같아'라고 말하더니 갑자기 고열의 환자가 되어 침대에 퍼져버렸다.
연휴였고 열이 39도나 되길래 응급실을 권했지만 남편은 또 '자고 일어나면 나을 거 같아'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을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혼자 요리를 시작했다. 재료를 씻고 손질하고 조리하는 등 6시간 동안 주방을 벗어나지 못했다. 6명에게 코스처럼 요리를 대접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이날 몸소 느꼈다. 남편은 곧 기절할 거 같은 모양새로 앓는 소리만 내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멀리서 오는 손님들을 돌려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남편친구들이 한두 명씩 도착을 했다. 다들 오자마자 남편부터 찾았다.
"병문안 가실래요?"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식은땀을 흘리며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환자 같은 남편의 모습에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남편은 자주 아팠다가 살아났다를 반복하는 이미지로 굳혀져 있었다.
"마, 내 부산에서 왔는데 누워서 인사할 기가."
그들은 걱정보다 놀리는 걸 택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상을 차리느라 바빴다.남편의 친구들은 어찌나 음식을 잘 먹는지 코스요리 따위는 애초에 사치였다. 쥐콩만한 양이 배에 찰 리가 없었고 그때부터 다시 요리가 시작됐다. 냉동식품부터 밀키트까지, 결국 우리집 일주일치 식량이 모두 사라졌다. 내가 주방에서 버틴지도 9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죽겠다 싶었다. 그때 남편이 방에서 좀비처럼 걸어 나왔다.
남편은 갑자기 그리고 꾸준히 아팠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걸로 몇 번의 다툼이 있었다. 그때부터 남편은 아프더라도 꼭 내 눈치를 봤다. 주방으로 다가온 남편이 이제 본인이 책임질 테니 나보고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자유의 몸이 되었다. 서로 바톤터치를 한 후부터 2차 집들이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자정부터 점점 살아나더니 그때부터 라면을 끓이고 게임을 하는 등 친구들과 잘 어울려서 놀았다. '사람 가지고 놀리나?' 방 안에서 웃음소리를 듣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1박2일 집들이의 끝은 부부싸움이었다.
"갑자기 아픈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도 답답해. 누군 아프고 싶어서 아픈 줄 알아?"
"그럼 약속이라도 잡지 말던지 오빠가 아프면 항상 뒤처리는 내 몫이잖아. 이게 지금 몇 번째야?"
"내가 그때 아플지 알고 약속을 잡았어? 혼자 요리하게 만든 건 미안하지만 누가 그렇게까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잖아."
남편도 남편대로 섭섭한 걸 이해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서 내가 아픈데 남편이 본인도 힘들다며 화를 내면 정말 섭섭할 거 같다. 그런데 이 일이 가끔, 1번, 2번 이런 수준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매월 이벤트처럼 겪는 몸살과 그때마다 남편이 해야 할 몫을 감당하는 나. 그리고 집들이 직전까지 사건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까지 자주 아플 수가 있어? 집들이 때도 내가 힘든 거 다 끝내니까 나와서 놀더니 진짜 다 꾀병 아니야?"
아픈 건 자의가 아니니까.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결국 해결책이 없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싸움이었다.사랑예찬론자인 나는 결혼 3년차에 그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나 눈앞이 잘 안 보여."
남편의 전화였다. 눈에 자주 실핏줄이 터지긴 했는데 앞이 안 보인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병원에서 보호자까지 오라는 말을 했단다. 아직도 생생한 추석연휴 직전의 평일날이었다. 회사일을 제쳐두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대기실에 멍하니 앉아있는 남편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 휴대폰에서 눈을 떼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가만히 있는 남편의 모습이 굉장히 어색했다. 오른쪽 눈의 망막이 구부러진 상태라고 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실명의 위험이 컸을 거란다. 의사선생님이 이걸 왜 여태 방치했냐며 우리를 질책했다. 그제야 남편이 자주 아팠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모든 원인은 당뇨였다.
- 발이 자주 붓고 혈액순환이 잘 안 돼서 다리의 피부색이 보랏빛이다.
- 졸음이 쉽게 쏟아지고 잠을 이기려고 버텨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 고열, 어지러움 등 몸살과 비슷한 증상을 자주 겪는다.
- 눈에 실핏줄이 자주 터진다.
나는 남편이 회사에서 2년마다 받는 건강검진 정도는 받는 줄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 자리에서 우리 둘 다 당뇨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안과에서 당뇨를 진단받았다.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남편이 병원복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아침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간이침대에 누워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시술을 받고 당일퇴원을 했다. 남편은 앞이 잘 안 보였고 내 도움 없이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어려웠다.
나는 남편의 어깨를 감싸고 길을 걸었다. 나보다 17cm 큰 남편의 어깨를 감싸고 걷는 게 여간 어색할 수가 없다. 평소였으면 남편이 내 어깨를 감쌌을 텐데, 씁쓸했다. 병원수납을 하고 택시를 부르고 남편의 짐을 챙겼다. 내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사이 남편은 한 걸음 뒤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 택시 안에서 남편은 조용히 바깥만 쳐다보고 있었다. '뭘 보고 있는 걸까?'한 번도 궁금한 적 없던 물음이었다. 그 해 추석을 기점으로 몇 번의 명절 동안 시댁에 가지 않았다. 이제 남편에게 장거리 운전은 무리였다.
시한폭탄처럼 변해버린 눈은, 간단한 시술에도 부작용으로 안압이 치솟았다. 결국 얼마뒤 녹내장 수술도 받았다. 한 번 망가진 눈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우안을 시작으로 좌안에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다니던 병원에서 소개를 받아 대학병원으로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