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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윱맹 Sep 29. 2024

서울에서 32평 아파트를 매매했다

내 인생의 암흑기 (1)

시댁이 부유한 줄 알았다. 남편이 '우리집 부자야'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정황상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하는 집안이란 것과 유학 중인 여동생 그리고 콧대 높은 시부모님의 모습에서 부유함을 느꼈다. 거기다 남편은 본인 연봉에 맞지 않는 국산 중형 SUV 신차를 타고 다녔고, 골프와 낚시 등 취미생활을 즐기는 모습에서도 여유가 느껴졌다. 여기에 화룡점정은 결혼식날이었다.


"나 저 집안 아는데, 신랑 외할아버지가 지역 유지셨잖아."


우리측 하객이 부모님에게 말했다. 내가 꼭 부잣집에 시집을 가는 것처럼 분위기가 형성됐다. 임신도 장기연애도 돈을 모아둔 것도 아닌데 또래보다 일찍 결혼을 하다 보니 그런 의심을 할 법도 했다. 실제로 남편의 외할아버지는 양산에서 정육식당을 했었고 장사 수완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다고 했다. 시아버지가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도 시외할아버지 덕분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나는 당연히 남편네가 부자인 줄 알았다.




빌라에서 산지 2년 만에 아파트 매매를 결심했다. 한날은 남편이 회사동료 집에 놀러를 갔다 오더니 그때 아파트에 꽂혀서 돌아왔다. 남편은 추진력이 정말 좋다. 내가 아파트 매매에 심드렁해하니 그 회사동료 집에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곧 그 회사동료네 앞집이 매물로 나왔다. 뭔가 이사를 가야 할 것만 같은 흐름이었다. 여기저기서 '지금이 집값 오르기 전 막차다'라고 수군거릴 때였다. 나도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신도림동에 있는 32평 아파트였다. 이사 가는 걸 동의만 하면 남편이 알아서 아파트를 매매하는 줄 알았다. 하다못해 너무 가고 싶어 했으니 무슨 수라도 있는 줄 알았다. 그때까진 집안 경제권도 남편에게 있었다. 가계약까진 했는데, 10% 계약금을 넣을 때부터 난관이 찾아왔다. 신혼집에 모든 돈이 묶여있는 탓이었다. 당장 돈을 구해야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 시댁이 부유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업이 잘 되던 시기도 있었겠지만 적어도 내가 결혼하고 본 시댁의 모습은 부유하진 않았다. 남편이 부자라고 한 건 아니었으니 속였다고 볼 수도 없었다. 어쨌든 시아버지도 일을 하고 있었고 여동생도 유학 중이니 돈이 없진 않다고 생각했다. 아파트 매매를 진행하던 그 시기에 우리는 양가 부모님의 재정상황을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


급한 대로 신용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다. 회사에서 가까운 역삼역 주거래 은행에 갔다. 은행직원이 내 방문목적을 묻더니 회사정보 등을 확인해 갔다. 그리고 꽤 오래 대기석에 앉아 기다렸다. 그때 한 젊은 남성이 은행에 들어오더니 직원에게 바로 다가갔다. 회사이름과 목적을 말하니 그 사람을 위한 전담 은행원이 배정되었다. 나는 한없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남성은 대기도 없이 미소로 응대를 받으며 앉아있었다.


"도와드릴 수는 있는데 준비해야 할 서류가 많으실 거예요. 모바일 어플로 대출을 실행해 보시는 게 빠를 수도 있어요."


기다린 것에 비해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28살(만 26세)/중소기업 재직/연봉 3,000만 원인 내가 강남 한복판에 신용대출을 받으러 왔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은행어플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하긴 했지만 그래도 부족했다. 결국 양가 부모님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황까지 와버렸다. 사실 지금이라도 이사를 포기하면 됐는데, 빌라를 처분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때 시댁에서 도움을 주기 어렵다는 말을 듣고 당황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 결혼했으면 강남에 집도 사줬을 텐데."


상견례 자리에서 시아버지에게 들었던 말이 아직도 생생했기 때문이다. 이미 결혼한 지 2년이 지났고, 집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계약금 일부만 빌려달라는 거였는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가 시어머니 생신사건이 종료되고 3달 정도 지난 시점이었기에 적어도 친정에는 손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7화) 하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거만 보태주면 해결되는 거야? 다른 힘든 건 없어?"


아빠는 '시댁에서는 안 해주니', '집을 왜 무리해서 사니' 이런 말 하나 없이 2천만 원을 보내주었다. 내가 받은 대출에 아빠가 보내준 돈보태서 계약금을 해결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그 사이에 빌라를 팔지 못했다. 다행히 세입자는 구했지만 아파트 잔금을 치를 돈이 한참 부족했다. 그때도 가장 먼저 아빠에게 전화를 했다. 8천만 원이나 모자랐다. 사실상 주택담보대출을 제외하면 우리 수중에 돈은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안해 딸. 아빠가 지금 8천까지 만들어 줄 상황은 안 되고, 은행에 물어보고 되는 만큼 보내줄게."


"딸, 듣고 있어? 전화가 끊겼나?"


시기 아빠는 할머니에게 집을 마련해 준다고 이미 꽤 많은 돈을 썼다. 아빠에게 효도는 못 할 망정 큰 부담을 안겨줘서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돈이 부족해서 우는 것처럼 보일까 봐 소리도 못 낸 채 눈물을 닦아냈다.


"아빠, 내가 저번에 빌린 거랑 지금 빌리는 돈까지 최대한 빨리 갚을게요. 정말 죄송해요."


다음날 아빠에게 돈을 받았다. 지금 바로 보내줄 수 있는 게 3천만 원뿐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아빠가 부족한 돈은 삼촌한테 말해서 빌려줄까 물었고, 나는 괜찮다고 했다. 아빠가 나 때문에 본인 동생들한테까지 고개를 숙이는 걸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계속 우리집에만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에 나는 한껏 예민해졌다. 아파트를 매매하자고 지금이 타이밍이라며 졸랐던 남편에게도 화가 났다. 남편에게 아빠 돈을 다 갚을 때까지 매월 이자를 보내라고 했다. 빌라도 팔아야 하고 아파트 잔금도 빌려야 하는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다행히 평소 친하게 지내던 지인에게 여유자금이 있어 차용증을 쓰고 돈을 빌렸다. 빌라가 매매되면 바로 갚는 조건이었다.


그로부터 반년 뒤 빌라가 팔렸고 지인에게 빌린 돈부터 바로 갚았다. 하지만 아빠 돈은 갚지 못했다. 아빠는 처음에 이자를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래야 너희가 마음이 편해진다면 보내라고 했다. 부모님 품 안에서 자라던 그 시절, 아빠는 결혼생활을 바닥부터 시작했으니 이미 무수히 많은 대출을 받으며 살아왔을 거다. 어떻게 우리가족이 계속 더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 있었는지 그땐 알지 못했다. 이번에 대출을 받으면서 없는 사람이 대출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이 더 불편했다. 아빠가 은행원에게 '돈 좀 빌리려고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우리부부가 아빠의 5천만 원을 갚는다는 건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매월 주담대와 마이너스 통장의 이자까지 해결해야 했다. 그 사이 나는 실적에 따라 연봉을 빨리 올릴 수도 있다는 광고영업회사로 이직을 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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