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에서 한 번 언급했지만 나는 고집 있는 사람이다. 겉보기에 유순하고 좀처럼 화내는 법이 없지만 생각보다 집요한 편이다. 내 고집의 역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다.
"너는 그렇게 동생이랑 같이 놀기 싫어하면서도 동네 애들이 동생이 타는 그네를 뺏거나 시비라도 걸면, 달려가서 아파트 단지 전체가 시끄러울 정도로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지. 너보다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오빠들 앞에서도 주눅 하나 안 들고 '내 동생 건드리지 마'라고 말할 때 엄마는 그게 그렇게 든든했단다."
어릴 적 동생은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허여멀건한 피부에 깡마르기까지 해서 누가 봐도 약해 보였다. 나는 좋은 누나는 아니었다. 동생과 같이 놀기 싫어서 도망 다니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생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받으면 그 순간 슈퍼맨으로 변신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오로지 고집이었다. 그들이 사과하거나 도망갈 때까지 지치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9층 우리집까지 고스란히 들렸고, 그때마다 엄마가 베란다에 나와 '무슨 일이야!'라고 외쳤던 기억이 난다. 그랬던 동생이 어느덧 31살의 건장한 어른이 되어 곧 결혼을 한다.
나는 대학생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영화, 영화감독 이런 건 잘 모르지만 영화에 집중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영화관 아르바이트로 롯데시네마 드리미와 CGV 미소지기도 해봤고, 영화제에서 자원봉사와 리뷰단 활동도 했었다. 그렇게 흘러 흘러 영화 마케팅 회사까지 입사하게 되었다. 야근을 안 해본 날이 없을 정도로 바빴지만 영화가 흥행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직무라 더없이 뿌듯했다. 나는 이 회사에서 첫 번째 유부녀가 되어 많은 축하도 받았다. 신혼 초에도 남편보다 직장동료들과 더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그만큼 이 회사는 나에게 특별했다.
유부남인 팀장님은 같은 기혼자인 나를 잘 챙겨주는 편이었다. 가끔 삐지기도 화를 내기도 했지만 부하직원 입장에서 나쁜 상사는 아니었다. 자신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걸 알려주고 다양한 기회를 주었다. 큰 회사에서는 2년 차가 맡을 수 없는 단독업무도 많이 했다. 그때 처음으로 직속후배도 생겼다. 누군가에게 업무를 지시하고 검토하는 위치에 선다는 게 설레면서 참 어려웠다. 하나 확실한 건 첫 후배라 정이 더 많이 갔다. 그 후배가 수습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정규직이 되길 바랐다.
서로한참 손발을 맞춰가던 어느 날, 팀장님이 우리 둘에게 회식을 제안했다. 나는 마침 선약이 있었고 내가 거절하면 회식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팀장님이 후배에게 둘이서라도 한 잔 하자고 말했다. 거절할 수 없는 위치에 있던 후배가 그 제안을 수락했다. 나도 팀장님과 둘이서 술을 마신 적이 있었기에 그 상황이 딱히 이상하진 않았다. 그냥 '오늘 후배님 좀 귀찮겠네' 이 정도의 마음이었다. 마침 약속장소도 서로 멀지 않아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만 남겨두고 자리를 떠났다.
다음날 후배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우물쭈물거리기도 하고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팀장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오전 미팅으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대리님, 혹시 밖에서 대화 가능하실까요?]
나가서 본 후배의 얼굴은 툭 치면 쓰러질 거 같이 창백했다. 그리고 전날 술자리에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손톱만큼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어제 일을 얘기하는 후배의 손, 다리,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그걸 바라보며 나라도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팀장님이 돌아오기 전에 대표님을 만나야 했다. 그렇게 대표님, 나, 후배 세 사람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후배가 말하다가 울면 또 내가 말했다가, 이야기를 들을수록 대표님의 얼굴도 굳어갔다.
대표님은 이 회사를 세우면서 처음 대표직을 맡게 되었다. 이제 갓 4년 정도 된 신생 회사였고, 팀장님은 대표님이 영화팀을 만들기 위해 스카우트해 온 초기멤버였다. 그런 상황인 걸 알기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있는 대표님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후배는 팀장님 얼굴을 봐야 한다면 그냥 본인이 퇴사를 하겠다고 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지 않으면 언젠가 더 큰 화를 부를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회사를 어떤 회사로 만들어갈 건지는 대표님의 선택이니 존중하겠습니다. 하지만 도려내지 못하시겠다면 저도 후배와함께 회사를 관두겠습니다."
결국 대표님은 일을 덮지 않고 진상규명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후배는 당분간 회사를 쉬게 되었다. 회사가 좁다 보니 대표님과 자주 면담하는 팀장님을 본 직원들도 곧 상황을 알게 되었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다행인 건 팀장님의 편을 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018년, 한창 미투운동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팀장님은 상호 합의하에라는 표현을 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게 본인이 한 행동을 인정한 꼴이 되었다. 합당한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건강이 급격하게 안 좋아진 후배가 결국 회사를 떠났다. 그렇게 이 싸움은 피해자가 없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나는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었지만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팀장님은 사과도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은 채 무책임하게 회사를 떠났다. 인수인계도 제대로 하지 않아 모두가 난감해했다. 동료들이 힘들어하는 걸 보며 꼭 내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표님은 원래 영화업계 사람이 아니었고, 팀장님은 쭉 이쪽에서 일하던 사람이었다. 이 사건이 뭐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몇몇 대표들이 팀장님을 두둔하며 다니기 시작했다.
한 날은 영화 쫑파티에 참석을 했다. 팀장님과 내가 맡은 작품이었는데 갈 사람이 없으니 대표님과 함께 자리를 했다. 다른 회사 대표님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조용히, 소곤소곤 이야기를 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 팀장은 잘못이 없다. 그냥 퇴사를 한 거다'라고 말하며 다니라고 했다. 내가 주도한 일이니 내 입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게 그의 논리였다.
"이 업계에서 오래 살아남고 싶지 않아? 김대리 그렇게 앞뒤 꽉 막힌 사람이었어?"
아예 팀장님과 같은 곳으로 이직을 하는 건 어떠냐고 했다. 지금보다 연봉을 더 받을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일단 한 잔 하시죠."
나는 꽉 막히지 않은 사람처럼 무해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 그냥 웃었다. 회식이 끝나자마자 대표님에게 방금 겪은 일을 얘기했다. 전봇대 아래서 대표님과 맞담배도 아닌 맞욕을 했다. 그들을 향해 욕을 하니 눈물이 참아졌다. 나는 그러고 반년 정도 회사를 더 다녔다. 그 기간에 누구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대표님이 큰 결정을 해주셨으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팀장님은 여전히 업계에 있었다. 시사회장에서 팀장님네 회사가 보이면 심장이 미친 듯이 빨리 뛰었다. 나는 분명 아무 죄가 없는데, 누구보다 죄인의 마음이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가끔 그 후배 생각이 났다. 나는 후배가 회사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그녀에게 다신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도 그렇게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팀장님이 없으면 망할 거라던 회사도 꽤 단단하게 잘 성장해 갔다. 오히려 피라미드 형태의 권력구조가 수평적으로 바뀌면서 곧 퇴사할 거라던 직원들도 장기근속을 꿈꾸게 되었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때쯤 나는 사표를 냈다. 대표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더는 죄송하지 않았다.
전편에서 이야기한 광고영업회사로의 이직은 자의면서 자의가 아니기도 했다. 나는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바로 이직을 했다. 새로운 일을 다시 배운다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부부는 아파트를 샀고, 나는 돈을 벌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