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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Sep 09. 2019

보조금과 익명성

남편은 무엇을 택했나

결혼을 하고, 정확하게는 아기를 낳고 나는 지역 맘 카페에 자주 들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잠깐 쓰고 말 아기용품을 중고로 사기 위해 카페에 가입했다. 아기가 한 달 정도 탄 점퍼루는 3만 원에, 앞으로 1년 정도 필요한 작은 원목 침대는 6만 원에 중고로 들였다. 필요한 아기용품 판매글이 올라왔다는 알람이 울릴 때마다 나는 첫 댓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먼저 댓글을 단 사람에게 판매하는 게 이 세계의 룰이다.)


내가 맘 카페의 매력에 푹 빠진 건, 이곳이 그야말로 정보의 바다라는 점이다. 주변 맛집은 물론 아기와 함께 다니기 좋은 곳, 추천 어린이집, 무료 공연 등 깨알 같은 정보들이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누군가 "혹시 스타필드 통신원 계신가요?"라고 올리면 실시간으로 스타필드의 주차 상황을 알려주는 댓글이 달린다.


최근 맘 카페를 뒤흔든 정보글 하나가 있었다. 인근 휴대폰 가게에서 10만 원도 안 되는 돈에 최신 휴대전화를 개통할 수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불과 얼마 전 제값에 휴대폰을 바꿨기 때문에 쓰린 속을 달래면서 댓글을 달았다. "저도 정보 좀 부탁드려요^^" 내 휴대폰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던 남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남편은 굉장히 신난 목소리로 퇴근길에 그곳에 들르겠다고 했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나고 집으로 돌아온 그는 빈손이었다. 손님이 많아서도, 휴대폰이 매진이 되어서도 아니었다. 휴대폰 가게에서 남편에게 명함을 요구해서다. 

SNS가 발달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게 일상이 된 시대에 남편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출처=picjumbo)

내 남편은 익명화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남자다. 사생활이 노출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 한 번은 아파트 단지 내 슈퍼 주인이 남편에게 아는 체하면서 인사를 했다. 슈퍼 주인은 남편의 퇴근시간, 남편이 주로 사는 것 또는 사지 않는 것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건넸다. 남편은 집에 돌아와 슈퍼 가기가 불편해졌다고 말했다. 필요한 물건만 사고 가는 익명의 손님에서 이제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단골손님이 되어야 한다. 그것도 타의에 의해. 아파트 인근 또 다른 슈퍼가 생겼을 때 남편은 비로소 해방감을 느꼈다.


남편이 높은 지위에 있거나 대단한 직장에 다니는 건 아니다. 그저 이런 특이한 성격 때문에 휴대폰 가게에 명함을 내놓기 꺼려했을 것이다. 사실상 불법 보조금이라 휴대폰 가게에서는 일종의 '보험'으로 명함을 받았을지 모른다. 내가 남편에게 "백수라고 하지"라고 말했더니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이.


이런 사람이 브런치에 본인에 대해 글을 쓰는 아내를 그저 두고 보는 건 신기하고 고마운 일이다. 남편은 "절대로 내가 나라는 게 알려져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한다. 나는 살얼음판 위를 걷는 심정으로 글을 쓰는 중이다.


아기가 태어나면서 남편의 익명화된 삶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다. 내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아파트 단지에 자주 산책을 나간 뒤부터다.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과 아기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인사를 나누는 이웃사촌이 되어 있다. 내가 인사를 하면 옆에 있는 남편이 따라서 인사를 안 할 수가 없다. 그 모습이 굉장히 어색하면서도 꽤 귀여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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