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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May 13. 2020

앤드루 잭슨과 제2 미국은행

미국 경제 역사 이야기 21

'제2 미국은행'은 1817년 1월 의회에 승인을 받아 1836년까지 20년의 면허 기간으로 시작되었다.


제2 미국은행과 1819년 공황


자본금은 3,500만 달러로 증가했고, 연방정부가 20%의 지분율로 가장 큰 대주주였다. 나머지 80%의 지분을 4천여 명의 개인투자가 들이 가지고 있었다. 25명의 이사 중 5명을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했다.


‘제1 미국은행’과 마찬가지로 연방정부의 세수입을 관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수입을 뺏긴 ‘주법은행’들의 주요 표적이 되었다.


1816년 '제2 미국은행'은 시작 초기에 경영진들의 사기 사건이나 주식투자 사건에 휘말리는 등(실제 증거가 나오기도 했다) 혼란이 많았다.



필라델피아의 '제2 미국 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와중에 1819년 미국에서 최초의 금융 공황이 발생하였다. ‘1819년 공황(The Panic of 1819)’은 영국과의 전쟁 과정에서 발행된 은행권(지폐)의 증가와 제조업의 급격한 성장, 서부의 토지 투기 등이 맞물리면서 발생한 금융 위기였다.


특히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생긴 광대한 토지는 은행까지 끌어들여 땅 투기의 열풍에 한몫하게 했고 토지의 매매차익으로 많은 졸부가 발생했다. 부의 양극화가 발생하면서 토지 가격에 과도한 거품이 생성되었다.


결국, 거품은 꺼졌다.


은행이 대출을 축소하고 기존 대출금을 잇달아 회수하면서 그것을 갚지 못한 회사들이 넘어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대출 담보로 잡은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게 되자, 재정 건전성을 맞추지 못한 주법은행들이 잇달아 파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융 공황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 여파는 1819년부터 1821까지 지속하였다. 공황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비로소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상의 삶에서 정치와 연방정부 정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것이다.


어수선한 경제 환경까지 겹치면서 '제2 미국은행'은 연방정부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니콜라스 비들  <출처 : 위키피디아>



이때 세 번째이자 마지막 은행장으로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 1786~1844)이 취임하고 나서야 '제 2 미국은행'은 그 역할을 바로 하게 된다(비들의 재직 기간은 1823년부터 1836년까지였다).


니콜라스 비들(Nicholas Biddle)의 취임


비들은 엄격한 기준과 확한 신용을 바탕으로 은행을 키워나갔다. 그는 경제의 상황에 맞춰 은행권 발급을 통한 통화조절을 진행하였다.


아울러 주법은행의 화폐 유통량을 적절히 조절하여 안정적인 통화관리를 진행해 나갔다. 주법은행의 인출요구가 한꺼번에 몰릴 경우, 즉시 유동성을 공급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현재 중앙은행의 역할인 최종대부자 역할도 수행하였다.


결과적으로 적절한 화폐 발행과 통화량 조절을 통해 연방정부의 경제를 튼튼히 만들어 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정쟁의 근본적인 이유에는 보이지 않는 계급 간의 갈등이 있었다. 특권층을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고, 은행가에 대한 감정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시기였다.


은행장인 비들은 필라델피아 명문가 집안 출신의 유학파였는데, 당시 서민 출신의 대통령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은 이러한 모습에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은행가들을 ‘화폐 권력’이라고 불렀다.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과 정치 철학


미국 제7대 대통령인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은 1767년 사우스캐롤라이나 변방의 가난한 아일랜드계 이민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전쟁 기간에 어머니와 두 형제를 잃으면서 고아로 성장했다. 이런 배경으로 영국에 대한 그의 반감은 대단했다. 어린 시절부터 고생하며 성장한 그는 고학으로 법률을 공부하여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곳에서 땅 투기로 큰돈을 벌었는데, 우연히 다른 사람의 채무 보증에 휘말려 큰 곤욕을 치르게 됐다(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15년이 걸렸다). 결국 모든 재산을 날린 뻔한 그는 이 사건 이후 은행에 대한 깊은 반감을 갖게 됐다.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영국군에 대승을 거둬 일약 전국적인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1829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제2 미국은행'에 대한 거부감을 숨기지 않았다.


잭슨은 대통령 선거 때 상대방의 흑색선전으로 심한 마음고생을 했다. 더구나 상대방 후보의 비방으로 심적 스트레스를 받은 그의 아내가 대통령 취임 3개월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되자, 그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극한 감정 표현을 나타내기도 했다.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  <출처 : 위키피디아>


그의 성격은 직설적이고 강공 스타일이었는데,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방식은 기존 대통령들과 다른 점이었다.


그의 정치적 성향은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라고 불린다. 전체적인 큰 방향은 제퍼슨의 철학을 이어받은 것이다.


 '잭슨 민주주의' 시대에 대통령과 행정부의 권한이 대폭 강화되고 의회의 권한은 반대로 축소되었다.


가장 큰 변화는 참정권의 확대였다. 그는 평등주의를 강조하여 기존 농장주 중심의 선거권을 일반 백인 남성들까지 참여할 수 있게 했다. 이로 인해 연방정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 폭도 넓어지게 된다.


아울러 법정에서는 배심원 제도를 강화하고 변호사의 지위를 향상, 법관의 권한을 축소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정책 중 '자유 방임주의 정책'은 개인의 이익을 존중하기 위해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고, 이것을 실현하는 과정에 정부가 개입하여 개인의 이익 실현과 그에 대한 노력을 간섭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물론 잭슨은 이러한 정책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방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된 것은 ‘제2 미국은행’이었다.


중앙은행인 ‘제2 미국은행’이 연방정부의 세수입으로 막대한 자금을 운용하고 있었고 그로 인한 권력을 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 은행을 독점과 특혜의 대상이라고 여겼다.


결국, 둘 사이에 필연적인 충돌을 가져오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은행 전쟁(Bank Wa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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