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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Dec 22. 2021

허버트 후버 대통령 02

대공황과 연관된 이야기 3

워렌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 대통령 시절에 상무장관이 된 후버는 하딩의 후임 대통령인 캘빈 쿨리지(John Calvin Coolidge, Jr.) 대통령 시대에도 직책을 이어 나갔다.




후버 대통령의 메달 <출처 : 위키피디아>


상무장관으로서의 역량 발휘


그는 상무부가 연방정부의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자신의 사업적 경험과 제1차 세계대전의 전시 경험을 바탕으로 시스템 마련에 주력했다.


생산량을 늘리고 데이터 중심의 체계를 만드는데 주력했다.


하지만 이 영향으로 너무도 많은 위원회와 하위 조직이 탄생되어 과도한 감독과 규제를 생성시켰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의 역할 중 두드러진 것은 라디오의 보급을 크게 늘린 것이었다.


라디오 보급의 노력


1923년에서 29년까지 라디오의 보급은 300만 대에서 1,000만대로 크게 늘어났는데, 그의 재임 중 진행한 라디오 회의가 라디오 방송 조직과 콘텐츠 개발, 보급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라디오 수신기를 든 후버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특히 1927년 라디오 법이 통과되는데 그의 역할이 컸다.


1927년에는 미시시피 대홍수(Great Mississippi Flood of 1927)커다란 재난 사항을 적절하게 처리하여 그의 정치적 토대를 다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런 대내외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1928년 대통령 선거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제31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버


결국 민주당의 앨 스미스 후보를 가뿐히 이기고 제3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그의 슬로건은 "모든 냄비에 닭고기를, 모든 차고에 자가용을!(A chicken in every pot, a car in every garage!)"이었는데, 1920년대 호황을 대변해 준 말이었다.


여기까지가 그의 최전성기였다.



후버 대통령의 당선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1929년 대공황이 본격적으로 불어 닥치자, 그의 행정적인 경험과 비즈니스적 마인드는 큰 효과를 못 보았다.


사실 후버의 입장에서는 앞선 쿨리지 대통령 시대부터 이어져 온 주식시장의 거품이 자신의 재임 기간에 터진 것이 억울하겠지만, 그의 후속 조치는 과거의 명성 대비 크게 부족했고 적시에 행동하지 못했다.


대공황에 허둥지둥하는 모습


무능한 점을 보여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금융권이 줄초상으로 문을 닫고 공장도 폐쇄되자 길거리에 실업자들이 넘쳐 남에도 특별한 대책을 시행하지 않았다.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시장과 흘러가는 시간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란 믿음 속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집무실의 후버 대통령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한 마디로 자유 방임주의만 굳게 고수하고 있었다.


당시 경제학자들은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을 고수하고 있었고 재무장관인 앤드류 앨런 마저도 청산주의(가만히 놔두면 시간이 자연스레 강자를 살리고 약자를 죽여 경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것)를 굳게 믿고 있었다.


대공황 해결의 어려움


물론 대공황의 모습은 이론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모델이었다.


케인스의 유효수요 이론은 몇 년 뒤인 1936년에 나온 모델이라 연방정부가 적자 재정을 통해 대규모 공급을 진행한다는 것을 생각하기 힘든 시기였다.



GNP 대비 국가 부채비율 <출처 : 위키피디아>



더구나 1930년 6월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awley Tariff Act)에 서명하여 더 큰 경제적 위기를 불러왔다.


추가적으로 후버의 성격상 내성적인 과 남 앞에 나서기 두려워하는 모습은 국민들에게 소통이 안된다는 더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경제를 망쳤다는 언론의 뉴스와 기사는 그의 인기를 더 하락시켰고 그 유명한 후버 빌과 후버 가죽, 후버 담요 등 그를 조롱하는 단어가 이 시기에 자주 등장했다.



후버 빌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그렇지만 그는 아예 손을 놓고 던 것은 아니었다.


재건금융공사 설립 주도


1932년 실업률이 역대 최고 수준인 23%에 도달하자 연방정부가 직접 경제 살리기에 나서도록 지시했다.


1932년 1월 의회를 설득하여 재건금융공사(RFC)를 설립하여 금융 기관, 철도회사, 지방 정부 등에 연방정부 담보 대출을 제공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워낙 호되게 당한 은행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기대만큼 효과가 크지 않았다.


이어 '연방 주택 융자 은행법(Federal Home Loan Bank Act)'에 서명하여 국민들이 주택 소유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기가 너무 늦었다.


바로 그해에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었고 후버는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대통령에게 압도적인 표 차이로 패배해 재선에 실패했다.



후버와 루스벨트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이후 대공황의 경제적 실패를 모두 뒤집어쓴 채 한동안 불명예를 안고 살아갔지만 비즈니스 실력만은 줄지 않았다.


퇴임 이후의 행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같은 당이 아님에도 후버를 중히 여겨 유럽 전쟁물자 공급에 관한 요직을 맡겼다.


그는 깔끔하고 사고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이후 그를 의장으로 한 후버위원회(Hoover Commission)가 설립되어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위한 다양한 행정적인 제안을 전달하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그는 공화당 출신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Dwight David Eisenhower) 대통령 시대에도 주요 요직을 경험했다.


후버는 대공황 재건의 실패로 오랫동안 역사적인 불명예를 안고 살아갔지만, 1970년대 들어 그의 명성이 회복되기 시작했다.


특히 자원봉사와 인도주의 관점에서 행동한 수많은 그의 업적들이 언론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말년의 후버 대통령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대표적인 것인 그가 재임시인 1931년에 공사를 시작한 볼더 댐(높이 221m, 저수량 320억m3)은 1936년 완공되어 콜로라도 강에 있는 미국 최대의 댐으로 명성이 높고 라스베이거스 탄생에 큰 기여를 했다.


 이 댐은 이후 1949년 그를 기려 후버 댐(Hoover Dam)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후버 댐 <출처 : 위키피디아>



이러한 다양한 평가를 받은 후버 대통령은 1964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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