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살던 집은 주택이었다. 1층엔 주인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고 우리 가족은 2층에 살았다. 내 방 책상에 앉으면 동네가 내려다보였고, 건너편 2층 집과 옥상이 보였다. 이웃집 아주머니가 빨래를 너는 모습도 보였고, 무더운 여름날에 이웃집 아저씨가 러닝 바람으로 체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열어둔 창문 사이로는 매미 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저녁이면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그 자리에 앉는 걸 참 좋아했다. 바람을 맞으며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숙제를 했다.
현관문을 열고선 복도처럼 생긴 집 앞 작은 통로를 걸어 다녔다. 그러면 1층 주인집에서 무럭무럭 자란 무화과나무가 우리 집까지 불쑥 올라와 그걸 구경하며 지냈다.
해가 질 시간이 되면 계단을 올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에 오르면 조금 더 높은 단이 있었다. 그곳에 올라가면 우리 동네에서도 가장 높은 내가 되었다. 아파트가 없어 내가 제일 키가 커졌다. 그러다 저 멀리 언덕을 올라오는 동네 친구를 만나면 손을 흔들기도 했다. 춤이 추고 싶으면 춤을 추고,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면 부끄러워 쓱 숨었다. 밤에는 별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옆집, 앞집이 함께 밥도 먹고 지낼 때라 우리 집에 자주 모였다.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 집 통로에 피자팬을 펼치고 피자를 만들어 먹었다. 엄마들과 아이들이 모여서 피자를 먹었다. 재미있는 기억들이 많이 모인 2층 집이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도 마음이 아려오는 선명한 순간이 있다. 삼십몇 년이 내 안에 축적이 되었으니 그런 기억이 꽤 많을 일이기도 하지만. 잊히지 않는 장면 중 하나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엄마와 아빠랑 1년 정도 떨어져 살던 때가 있었다. 이유는 두 분이 대구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가게를 하게 되면서부터다. 엄마는 한 달에 한 번씩 대구로 왔다. 그간 밀린 볼일을 보고 집으로 와서 반찬을 만들고 집을 청소했다. 다시 가게를 열어야 하니 엄마는 하루만 머물고 돌아가야 했다. 엄마가 한 달에 한 번 집으로 올 때면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간이 얼마나 달콤하고 짧았는지. 엄마 손을 꼭 붙들고 잠에 든 채로, 다음날 엄마가 다시 돌아갈 때면 눈물이 자꾸 나려고 했지만 참았다. 엄마가 더 힘들고 미안할 것이기에.
엄마가 다시 돌아가는 날에는 2층 담벼락에 서서 엄마가 언덕을 내려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슬프다는 것을 깊게 느꼈던 때였던 것 같다. 엄마 보고 싶어. 하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엄마가 들으면 안 되니까. 눈물이 차올라서 엄마가 자꾸 흐릿하게 보였다. 엄마가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봐주길 기다리면서도, 돌아보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울면 엄마가 더 슬퍼할 테니까. 생각해 보면 엄마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도 울고 있어서였겠지. 모든 사랑에는 마음이 존재하고, 존재하는 마음들은 오고 가기 마련이다. 마음 안에 있는 슬픔도 그리움도 두 사람에게 함께 온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있을 때 그렇다.
모든 이별의 순간들 중에서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리워도 그리워할 시간에는 기다림이라는 게 필요한 때였으니까. 보고 싶다고 다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간만큼 그리움은 깊어졌고 그리움이 깊어진 만큼 다시 만날 때의 마음은 넘치도록 배가 되었다. 한 달 뒤에 다시 엄마를 만나는 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살아갔다. 그리고 한 달 뒤에 다시 엄마를 만날 때면 너무 좋았다.
방학이 되면 엄마 아빠의 가게로 놀러 갔다. 가게 안에 있던 방에서 먹고 자고 놀았다. 엄마 아빠를 매일 볼 수 있어서, 엄마 아빠 옆에서 잠들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리워하던 존재가 다시 곁에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안정감이 되었는지. 앞으로도 긴 시간 두 사람을 그리워할 텐데, 내가 나아가면 언제든 엄마 아빠가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다시 내게 큰 안정감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