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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의 비밀은 TMI에 있다

by 정지영

"지루함의 비밀은 모든 것을 말해버리는 데에 있다.(The secret of being a bore is to tell everything.)(볼테르 (Voltaire), '인간의 본성에 관하여' 중에서)


모임에서 누군가의 이야기가 끝날 줄 모르고 길어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휴대폰으로 돌리게 됩니다. 처음엔 흥미롭던 대화가 점점 지루해지는 데는 공통된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모든 것을 다 말하려는 욕심"입니다.


프랑스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의 명언 "지루함의 비밀은 모든 것을 말하는 데 있다"는 단순한 대화의 기술을 넘어 삶의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말이 많아지는 걸까요? 과연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항상 최선일까요?



계몽의 수단으로서의 ‘간결함’과 ‘유머’

볼테르는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의 핵심 사상가로, 복잡한 사유를 간결하게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그는 풍자와 기지를 통해 독자의 생각을 자극하는 방식을 즐겨 사용했으며, 철학이 학자들만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이 삶을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을 말하는 사람은 지루하다"는 말은 단순한 대화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사유의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볼테르의 철학적 전략을 보여주는 핵심 문장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보다 일부를 비워두어 독자가 질문하고 생각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철학은 정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여는 것이라는 그의 신념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계몽주의적 전략: 침묵과 생략이 주는 자유

볼테르의 대표작 『캉디드(Candide)』는 짧고도 신랄한 풍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이 세상은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비꼬기 위해 주인공 캉디드를 끊임없는 고난과 비극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넣습니다. 리스본 대지진, 전쟁의 참화, 종교적 박해, 잔인한 노예 제도 등 당대 유럽 사회의 모순을 캉디드가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볼테르는 이 본질적인 질문에 직접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야기의 마지막에 "우리는 우리의 정원을 가꿔야 한다(Il faut cultiver notre jardin)"라는 함축적인 문장만을 남깁니다. 이 간결하고 여운이 가득한 결말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이것이 바로 볼테르가 즐겨 사용한 침묵과 여백의 기술입니다.


또 다른 작품 『미크로메가스(Micromégas)』에서는 거대한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해 인간을 관찰하는 설정을 통해 인간 중심주의를 날카롭게 풍자합니다. 자신을 "철학자"라 자처하며 존재와 우주의 본질을 다 안다고 자부하는 인간들 앞에서, 미크로메가스는 단호하게 "사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일침을 가합니다. 그러나 볼테르는 이 장면을 장황한 설명으로 풀어내지 않고, 간결한 문장과 상징적인 설정만으로 인간의 오만과 무지를 꼬집으며 깊은 사유로 독자를 유도합니다.


이처럼 볼테르는 진실을 직접적으로 외치기보다 비유와 생략, 반어의 기법을 교묘하게 활용해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글은 겉보기에 유머러스하고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철학적 메시지와 독자의 지성을 향한 굳건한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표현했습니다. 그가 남긴 침묵과 여백은 단순한 미학적 장치가 아니라, 지적 자유와 사유의 공간을 열어주는 철학적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과잉 정보 시대에서의 ‘생략의 미덕’

오늘날 우리는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SNS는 일상의 모든 순간을 낱낱이 기록하도록 유도하고, 콘텐츠는 점점 더 많은 설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심지어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조차 빠짐없이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잉 설명은 오히려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핵심을 흐리게 만듭니다. 볼테르의 경구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강력한 울림을 줍니다. 모든 것을 말하면 지루해질 뿐 아니라, 생각할 여지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간결하고 본질적인 표현은 독자가 자신만의 해석을 더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줍니다.


볼테르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말하지 않음은 무지의 표현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존중이며 자유를 선사하는 태도입니다.




질문이 시작되는 곳

볼테르의 말은 철학의 근본적인 태도를 상기시킵니다. 철학은 언제나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것을 설명하고 나면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지만, 일부를 남겨둘 때 우리는 "왜?"라고 묻게 됩니다. 바로 그 물음이 사유의 출발점입니다.


심 리학자 빅토르 프랭클은 "삶의 의미는 질문이 던져질 때 시작된다"고 말했습니다. 볼테르 역시 이처럼 사유의 문을 여는 사람으로서 침묵과 생략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독자에게 "더 생각할 것"을 남겨두며, 철학을 지적 권위가 아닌 해방의 도구로 만들었습니다.



말하지 않은 것의 힘

볼테르의 말은 단순한 유머가 아닙니다. 그것은 지루함을 피하는 대화 전략이자, 사유를 자극하는 철학적 태도입니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상대의 해석과 감정, 사유의 공간을 존중하게 됩니다. 볼테르는 독자의 지성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설명하기보다, 일부만 보여줌으로써 철학적 대화의 시작점을 마련했습니다. 이는 곧 인간의 이성과 자유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여주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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