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슬산 진달래를 본 다음날(2023.04.16. 일. 흐림), 십 대의 어린 나를 보듬어 준 마음의 고향 추억의 대구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탐방 코스는 앞산공원과 동무생각의 청라 언덕, 계산 성당, 시인 이상화 고택 그리고 국채부상운동의 서상돈 선생 고택이다.
현풍에서 급행 8번 버스를 타고 진천역에서 하차했다. 작년에 보았던 선사시대 돌망치를 치켜든 아저씨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사 시대 조상님
그동안 아저씨의 골격이 많이 쇄락해진 것 같았다. 역 주변에는 선사유적이 산재해 있다. 곧바로 앞산 공원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앞산은 대구 앞(남) 쪽에 위치한 해발고도 660.3m의 산이다. 분지형이라 바람 없는 여름철 경우에는 가마솥 안이 따로 없다.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라는 별명도 있다.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속대발광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가 딱 들어맞는 말이다. 시인 두보(杜甫)의 조추고열(早秋高熱)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찌는듯한 초가을의 늦더위에 머리에는 관을 쓰고 허리에는 띠를 매고 점잖게 예복을 갖추고 앉았노라니 더위를 참다못해 미칠 것만 같아서 큰 소리로 부르짖고 싶다는 뜻이라고 한다.
대구 남구와 수성구에 걸쳐 있으며, 대구에서 가장 큰 자연공원이다. 심신수련장, 케이블카 등이 있으며,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특히 대구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워낙 오래간만이라 ‘전망대‘란 지명 착각으로 버스를 잘못 탔다. 전망대에 가면 대구 시내를 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 앞산 해넘이전망대에서 내렸다. 당초 목표는 이호우 시인의 시비를 보는 것이었다. 수십 년 전에 가본 후 처음이라 접근하면서 계속 표지판을 보고 걸었다. 길에서 몇 사람에게 두어 번 길을 물어보았다.결과적으로 지명 착각 덕분에 앞산 순환도로 주변의 관광명소를 두루두루 산책하였다.
무당골 등에서 흘러내린 물을 이용하여 엄마들이 빨래를 하던 장소였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장소였다고 한다. 빨래터 옆 우물에서 물동이와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나르는 어머니 아버지 상에서 옛날 어릴 적 시골 생각이 저절로 났다.
물동이 지게
앞산 해넘이전망대
일몰과 함께 대구의 경관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앞산 빨래터 공원 상단에 있다. 13m의 타워와 243m의 경사로로 구성되어 있다. 경사로가 완만하여 앞산과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특히 분지 안의 도시에 석양의 기운을 가득 담는 저녁노을이 멋있다고 한다.
앞산 하늘다리
앞산 하늘다리는 해넘이 전망대가 위치한 앞산 빨래터 공원과 앞산 골안골 캠핑장 사이 앞산순환도로를 가로지르는 하늘을 거니는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보행 육교다. 지나가는 분에게 물어보니 공사 중이라고 한다.
앞산 맛 둘레길
앞산 맛 둘레길
앞산 둘레 길에 맛 집이 백여 곳 있다고 한다. 갈 길 바쁜 나그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카페들이 멋있다. 벚나무 거리에는 벌써 벚꽃이 다 지고 잎이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별자리 스토리 / 출산
별자리 스토리
저녁시간에 반짝거리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환상적인 장소라고 한다. 낮에도 전구들이 빛을 수놓기 때문에 별을 헤는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늘 다리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근처에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석상이 있다. 출산을 의미한다고 한다.
대덕 문화 전당
대덕문화전당
공연장을 1998년에 개관하였다. 객석수는 총 536석 규모라고 한다.
남부 도서관
남부도서관
1995년도 개관하였으며 대지 18,082㎡, 건물 7,533.05㎡ 규모다. 각종 도서자료 대출과 열람, 평생교육 강좌 운영, 독서문화 행사 개최 등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충혼탑
충혼탑
충혼탑은 108개 계단을 이용해 탑신까지 올라갈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면 조국을 위해 희생하신 6·25 참전 용사들의 용맹한 투지를 담은 벽화가 충혼탑을 감싸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충혼탑의 규모는 부지 면적 1만 8천694㎡에 탑신 30m, 둘레 9m, 기단 15m이다.
왕건 이야기로
왕건 이야기로
왕건은 927년 팔공산전투에서 후백제 왕 견훤의 군대에게 대패하여 앞산 방향으로 죽자 사자 달아났다. 신숭겸 장군이 왕건의 옷으로 갈아입고 왕건 대신 목숨을 잃었다. 3일 동안 숨어 지냈던 앞산 왕굴이 있다. 앞산에 머무는 동안 화전민의 도움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아 고려 왕조를 세웠다.
케이블카 탑승장
케이블카 매표소
계곡의 다람쥐가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산꼭대기의 앞산전망대는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관광의 명소다. 앞산전망대의 건축물은 도시와 자연, 역사와 미래를 함께 엮어낸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시간관계상 탑승은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시인 이호우 개화 시비
이호우 시비(詩碑)
옛날 국어 교과서에 시인의 시 ‘개화’가 실려 있었다. 앞산공원 시비에 새겨져 있다. 어릴 적 기억에 남아 꼭 찾아보고 싶었다. 남사자교(南獅子橋)를 건너 시인의 길옆에 시비가 있다. 오늘 앞산공원에 온 주목적이다. 초등 아이들이 시비 주변에 모여 앉아 선생님과 함께 열심히 글을 짓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개화(開花)
꽃이 피네 한잎 한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침내 남은 한 잎이
마지막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볕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이호우(李鎬雨, 1912∼1970) 시인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밀양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제일 고등 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동경 예술 대학에 유학하였다. 1940년 시조 「달밤」이 이병기에 의해 『문장』지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1949년에는 남로당 도 간부라는 모략을 받아 군법회의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으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광섭 시인의 진언으로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호우 시비
1956년부터 『대구 매일신문』편집국장, 『매일신문』편집국장을 역임하며 많은 칼럼을 쓰는 등 묵묵히 언론인의 길을 함께 걸었다. 1958년 KNA기 납북 사건 때 『매일신문』사설로 필화를 겪기도 하였으며 청마 유치환과 전국 예술 단체 총연맹을 결성하여 사무를 맡기도 하였다. 1967년 영남 시조 문학회 초대 회장을 맡아 사라져 가는 민족 문학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0년 1월 대구 동문 다방을 나와 귀가하다가 심장 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옮기던 중 59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183㎝의 훤칠한 키에 체중 55㎏의 바싹 마른 체구의 이호우로서는 당시 상황 어느 한 가지도 감내하기가 쉽지 않은 일들이었다. 문인장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유해는 고향집 청도 건너편인 밀양시 상동면 어목산(漁目山) 중턱의 선영에 잠들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향토문화전자대전)
이호우 시비 위치
영남문학회와 문단의 모금으로 시비가 세워졌다.그는 한 민족, 한 국가에는 반드시 그 민족의 호흡인 국민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시조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국민시는 간결한 형(型)과 서민적이고 주변적이며 평명(平明)한 내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먼저 나의 목소리와 핏빛과 몸짓과 식성 또는 체온을 찾고 배우고 생각해 보는 마음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1972년 시인 이윤수 등 문인들에 의해 대구 앞산 공원에 ‘이호우 시비’가 제막되었다. 1992년 고향의 주민들에 의해 밀양 남성현 고개에 「살구꽃 핀 마을」을 새긴 시비가 세워졌다. 2003년 11월에는 청도 고향 마을 앞에 또 하나의 시비를 세워졌다.이호우 시조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차별성은 투철한 시정신일 것이다. 이호우는 작품 한 편을 두고 수십 년 동안 퇴고(推敲)와 개작을 거듭할 정도로 철저하였다고 한다.
시인 이영도
李永道(이영도)는 이호우 시인의 누이동생이다. 1968년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발간했다. 타고난 문장력과 뛰어난 총명, 곧은 성격을 가졌다. 시대 상황이 날로 어수선해지자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20세에 결혼을 하였다. 1936년 10월에 딸을 얻었다. 1945년 8월 병약했던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해방이 남편을 잃은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운명적 만남이 있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유치환의 ‘편지’의 주인공이다. 통영 여자 중학교(1945년 10월∼1953년 5월) 교사로서 재직 중 그 학교에서 교사로 같이 근무한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 시인을 만났다.
유치환의 일방적 애정 표현으로 시작된 사랑은 많은 안타까움과 우여곡절을 거듭하였다. 1967년 2월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치환이 사망하였다. 유치환이 20여 년간 이영도에게 보낸 연서가 5,000통에 이르렀고, 유치환의 사후 그 일부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으로 묶여 발행되었다.
이은상 시인은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맑고, 고요하고, 격조 높은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또 시를 생활화하고 간 여인이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청도 내호리에는 그들의 생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청도군에서는 생가 일대에 그들을 기리기 위한 ‘오누이 시비 공원’을 건립하였다. 소공원 내에는 이호우 시비와 이영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매년 11월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조 문학제를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이윤수 시비
이윤수 시비(詩碑)
李潤守(이윤수, 1914~1997) 시인으로 대구 출생, 호는 石牛(석우) 대한민국 최초의 시전문지 竹筍(죽순) 창간했다. 곰같이 우직하다는 소리를 들으며 한평생 시동인 '죽순구락부'를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한다. 이호우, 유치환, 이영도, 박목월 등과 함께 작품활동을 했다. 1948년 김소운과 함께 대한민국 최초의 詩碑(시비) ‘尙火(상화) 詩碑(시비)’를 대구 달성공원에 건립하고, 이상화선생 추모 사업회 결성을 주도하는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파도”
海風이 앗아가는 봄을 어루만지며
외로이 모래밭에 엎드려
모래알을 헤인다
억겁일월
밀려 갔다 밀려 오는 파도처럼
아아!
헤아려도 헤아려도 헤아릴 수 없는
人間 삶의
사랑과 슬픔과 고뇌의 씨앗들
파도 되어 밀려 온다
낙동강 승전 기념관
낙동강 승전 기념관
6. 25 전쟁 당시 조국 수호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고 대구를 죽음으로 지켰던 참전 유공자들의 거룩한 얼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관을 1979년 건립하였다. 일명 “승공관”이라고도 하는 이 기념관에는 그 당시의 유물 및 자료가 전시되어 있어 시민들에게 한국전쟁의 뼈아픈 교훈과 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우재 이시영 선생 기념탑
우재 이시영 선생 순국 기념탑
애국의 길옆에 우뚝 서 있다. 이시영(李始榮, 1882년 ~ 1919년) 선생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대구 출생이며, 동명이인인 이시영(李始榮, 성재 이시영) 선생과의 구별을 위해 '우재 이시영'으로 부른다. 무인(武人)의 기상이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시(詩)와 글씨(書), 그림(畵)에 모두 능하였고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그런 성격이었다. 이러한 그의 성격과 과단성 있는 추진력 때문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는 그를 날개 달린 호랑이라고 칭찬하였다.
1914년 다시 출국하여 북경으로 가 그곳에서 김좌진(金佐鎭) 장군등과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3월 3·1 운동 직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의 인재를 길러내 힘으로 왜적을 몰아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유하현 삼원포(柳河縣 三源浦)에 한인무관학교(韓人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19년 7월 9일 피로와 식중독으로 병을 얻어 사망하고 말았다. 그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창호는 문무겸전한 우재가 갔으니 또 하나 큰 별을 잃었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봄길을 걸어가는, 길이 되는 사람들
애국의 길옆에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이란 시를 발견하였다. 옆 계곡에는 유치원 친구들이 재잘거리며 선생님과 개구리알과 햇볕 쬐러 물가로 나온 자라등 자연을 탐구하고 있었다. 봄길을 걸어가는, 길이 되는 사람들이다.
봄길 정호승 시인
봄길
(시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글이 길어져 동무생각의 청라 언덕, 계산 성당, 시인 이상화 고택 그리고 국채부상운동의 서상돈 선생 고택 이야기는 다음 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