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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왜성 (蔚山倭城)과 임진(정유) 왜란

양산 통도사, 울산왜성, 울산 서생포왜성 탐방(2)

by 애바다
img1.daumcdn.jpg 임진왜란 연표
img1.daumcdn.png 4로 병진 작전 노선도(울산 왜성 전투, 임진왜란 종전 전환 분기점)

<임진왜란 약사>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 1592년 4월 13일~1598년 11월 19일(음력)

정유재란 : 1597년 8월 ~ 1598년 11월

제1차 울산왜성 전투 (1597년 12월 23~1598년 1월 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1598년 8월 18일


제2차 울산왜성 전투(1598년 9월 22일~ 9월 25일)

순천 왜교성 전투: 1598년 9월 20일 ~ 10월 7일

사천성 전투 : 1598년 9월 20일~ 10월 1일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전사)

남해왜성 소탕전: 11월 21일

KakaoTalk_20250131_225010795.jpg 울산 왜성 재현도 (도산성, 증성 / 출처 : KBS 화면)

설 연휴를 맞아 경남 양산 통도사, 울산 왜성, 울산 서생포 왜성을 탐방(2025.01.25. 토, 비)했다. 다음날(2025.01.26. 일, 흐림)은 경남 창녕의 교동 고분군과 ‘송현이 특별전시전’ 중인 창녕 박물관, 철새의 낙원 우포늪을 둘러보았다.

첫째 날 : 서울 수서역~울산(통도사) 역> 통도사> 울산 왜성> 울산 서생포 왜성> 대구

둘째 날 :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 창녕 박물관> 우포늪> 동대구역~수서역


전회 통도사에 이어, 금회 주제는 울산 왜성이다. 울산 왜성과 울산 서생포 왜성을 찾은 이유는 임진(정유) 재란시, 왜군의 후퇴와 종전 과정이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20250125_135725.jpg 학성 공원(울산왜성, 도산성, 증성), 우측 문화해설사 사무소
20250125_135708.jpg 울산(통도사) 역---> 학성공원 노선버스(5003번 리무진)
20250125_153734.jpg 태화강

통도사에서 울산(통도사) 역으로 복귀하여, 5003번 리무진 버스로 갈아타서 학성공원(울산왜성) 입구에서 내렸다. 입구에서 도산성(울산 왜성) 전투 일자별 표지석을 읽고 있었다. 문화 해설사 한분이 사무실에서 나오셨다. 울산왜성 성곽의 역사에 대하여 여러 가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3 지환, 2 지환을 거쳐 꼭대기의 본환까지 동행하여 주셔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Ulsan_waesung_attack.jpg 울산왜성 전투도(울산왜성 1차 전투 상황)

성을 쌓은 산 주변이 섬과 같은 지형이기 때문에 도산성(島山城)이라 불렀다. 혹은 떡 찌는 시루를 엎은 것 같다고 하여 증성(甑城)이라고도 불렀다. 면적은 약 60,0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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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형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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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단 성벽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1597년 9월 경기도 부근 직산(소사벌, 천안 일대)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에게 패한 왜군이 전라 경상 남해안쪽으로 밀려 남하하여 각 지역 요충지에 방어 장기전을 위하여 30여 개소에 왜성을 쌓았다.


울산왜성은 직산 전투 후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울산시 중구 학성동에 신라의 계변성이라는 성터를 기반으로 쌓은 왜성이다. 1597년(선조 30) 11월 초순부터 12월 하순까지 23,000명을 동원하여 울산읍성과 병영성의 돌을 헐어 급하게 40여 일만에 쌓은 일본식 성이다. 여러 겹의 소곽이 단을 이루며 구축된 형태다. 석성으로 쌓은 주곽부(내성)와 토성으로 쌓은 외곽부(외성)로 구성하였다.

20250125_143645.jpg 울산왜성 모형(1, 산 정상부에 위치)
KakaoTalk_20250127_151308965.jpg 울산 왜성 모형(2)

주곽부는 해발 50m인 꼭대기에 본환(本丸)을 두고, 본환 아래 해발 35m 지점에 이지환(二之丸)을 배치하였다. 그 아래 해발 25m 지점에 삼지환(三之丸)을 두었다. 길이를 모두 합하면 1,400m이고, 성벽의 높이는 10~15m였다. 주곽부 남쪽에는 군수물자 수송을 위해 항시 배를 댈 수 있는 凹자 형태의 선착장을 만들었다.

20250125_144129.jpg 울산 왜성 비

주곽부 밖의 외곽부는 태화강에 면한 남쪽을 제외한 동 서 북 3면에 2,700m의 토루와 해자를 두르고 목책을 세워 외성을 구축하였다.

20250125_144518.jpg 울산 왜성 외곽부 토성터(나팔등, 붉은 둥근 선)

현재 도시화로 인해 외곽부 토성터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선박 접안이 가능한 선입지는 왜란 후 우리 수군이 사용하였으며, 1624년(인조 2년)에는 선착장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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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지(선착장, 붉은 원 안) 위치 / 천수각의 예 (지휘소, 순천 왜성의 천수단임)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1차 왜성 전투) 및 1598년 9월 22일부터 9월 25일(2차 왜성 전투)까지 조(朝) · 명(明) 연합군이 두 차례에 걸쳐 울산왜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조명 연합군의 사로병진 전략에 의해 후퇴를 거듭하던 왜군은 마지막 보루지였던 울산왜성, 사천 왜성, 순천왜성에서 필사의 저항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명연합군에 의해 완전 포위된 울산 왜성의 왜군은 식량과 탄약과 식수가 부족하여 괴멸 전멸 직전에 이르렀다. 군마의 피와 오줌을 마시거나, 종이나 흙벽까지 끓여 먹을 정도로 성내의 상황이 풍전등화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에, 철수령에 따라 울산왜성의 성채를 불태우고 서생포왜성으로 퇴각하였다.


울산왜성은 사천왜성, 순천왜성과 더불어 왜군과 조 · 명연합군의 실제 전투가 있었던 정유재란 당시 3대 전투 현장의 한 장소다. 일반적인 왜성과는 달리 천수각의 시설이 발견되지 않았다. 원래부터 없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왜성을 완공한 뒤 얼마 되지 않아 울산왜성 전투가 일어났으며, 미처 천수각을 설치할 시간이 없었다.

KakaoTalk_20250131_225010795_02.jpg 구마모토 성 (KBS 화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는 울산왜성에서 군마의 피와 오줌을 마셨고, 종이나 흙벽까지 끓여 먹었고, 심지어 할복자살을 결심하기도 했다. 그는 임진왜란 끝에 왜국으로 물러난 후 울산성 전투 당시 식량과 식수 부족으로 침몰 직전의 상황과 처절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3 대성의 하나인 난공불락의 구마모토성을 축성했다.

KakaoTalk_20250131_225010795_03.jpg 울산 왜성 전투도 (전투장면, 부상자들 및 말을 해체하고 말 생고기를 먹은 장면, KBS 화면)

그는 구마모토성에서는 식용 가능한 토란 줄기로 만든 다다미를 짜고, 성벽에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조롱박들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군량용 은행나무와 소나무를 심었다. 토란 줄기와 은행열매와 소나무는 야전 전투 식량용이다. 된장으로 조려서 말린 토란 줄기는 노끈으로 만들어 허리에 감고 다니다가 숙영지에서 끓이면 즉석 된장국이 되었다. 심지어 성의 밧줄과 흙벽에 넣는 짚에도 토란줄기를 사용했다. 식수 부족을 막기 위해 성 안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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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대

1913년 울산의 유지였던 추전 김홍조는 울산왜성 터 주변 7천여 평의 땅을 구입해 가꾸고 학성공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흑송, 벚꽃, 매화 등을 심었던 이 공원은, 1928년 울산면에 기증되어 현재까지 울산의 대표적인 도시공원이 되었다. 공원 부지 내에는 봄편지 노래비, 박상진 의사 추모비, 충혼비, 놀이터와 운동기구 및 각종 편의시설이 있다.

20250125_143418.jpg 학성 공원

학성공원은 울산을 대표하는 시민들의 휴식처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한동안 울산왜성의 보존에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하여 인도와 화단을 조성하고 편의시설과 상점을 유치하면서, 북서쪽 석축과 제2곽(2 지환) 및 제3곽(3 지환)은 대부분 훼손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지워버리고 잊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제는 오히려 그 처절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돌에 역사를 새겨 후손들에게 전해줄 만큼, 자존감과 역사의식을 회복했다.

20250125_142628.jpg 울산 왜성 전투도(조명 연합군에 의해 완전 포위됨)

1차 울산(도산성) 전투 (1597년 12월 23~1598년 1월 4일)

조선의 도원수 권율과 명나라 장군 양호(楊鎬)는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와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 중 누구를 먼저 쳐야 할지 의논했다. 울산 왜성이 왜군의 중심 본거지라는 이유로 1597년 12월 23일 전력을 기울여 총공격했다. 즉, 핵심을 직접 타격하는 정공법을 택한 것이다.


이때 조명연합군은 조선군 1만 1천 명, 명군 3만 6천 명으로 명나라 제독 마귀도 합세해, 총 4만 7천 명이 울산왜성을 공격했다. 울산왜성은 가토 기요마사 왜군 1만 6천 명이 지키고 있었다.


울산 왜군 측은 전황이 긴박해 지자, 서생포 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울산왜성으로 들어왔다. 남해 쪽 왜군 부대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조명 연합군의 주요 공격점이 울산왜성 한 곳으로 판명되자, 숨통이 터지고 다소 여유가 생긴 다른 남해 쪽 왜성 왜병들이 일제히 구원 출정을 하였다. 심지어 고니시의 순천 왜성 일부 왜군까지 지원하려 달려왔다. 구원병의 합세로 도합 약 6만 명의 병력이 추가되어 왜군 지원군이 대폭 증원되었다. 왜군의 군사력이 우세해졌다. 부득이 조명 연합군은 경주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구사일생 혼줄이 난 13명의 왜군 장수들은 울산, 순천, 양산을 포기하고, 서생포와 사천으로 철수하게 해달라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연서명으로 청원하였다. 그가 거절했다. 결국은 서생포왜성으로 후퇴하여 버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왜국으로 패퇴 철수하였다.


요약하면 울산왜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이 결정적 승리를 하지는 못하였으나, 정유재란의 한 획을 긋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 왜군은 남쪽 해안으로 퇴각하여 방어에만 급급하다가, 패퇴하여 조선반도에서 사라졌다. (참조 : KBS 역사 스페셜, 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 https://youtu.be/QBshDvzH-M0)

KakaoTalk_20250131_225010795_01.jpg 울산 왜성 전투도(성내 외)

울산왜성 전투 장면은 사가현 번주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화공이 그렸다. 1874년 사가의 난 때 소실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1886년 오쿠보 세츠도가 다시 제작하였다. 문화 관광 해설 사무실 앞에 도산성(울산 왜성) 전투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아래와 같이 일자별로 돌에 새겨두었다. 아픈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돌에 세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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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도산성 전투(1597.12.23.~159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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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3.

명나라 군대가 울산에 도착하여 울산왜성 앞 왜군 병영을 불태웠으며, 권율장군도 조선군을 거느리고 참가하였다. 왜군은 장수 6명을 포함하여 500여 명이 전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왜성에서 울산왜성으로 급히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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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4.

조명연합군이 새벽에 출전하여 대포와 불화살을 쏘는 대대적인 공격을 펼쳤다. 울산왜성 외곽의 3중 목책을 돌파하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왜군은 왜성 내성에 집결해 농성 체제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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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5.

조명연합군은 3면을 포위하고 대포와 불화살을 쏘면서 공격했으며, 왜군은 철환을 쏘아 성벽을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명나라 양호 장군이 울산왜성에 우물이 없어 급수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남쪽 성 아래의 급수로는 차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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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6.

조선군 전 병력이 성벽 아래로 접근하여 마른풀과 섶으로 불 공격을 하였으나, 적 총탄에 사상자가 많이 생겼다. 성에 갇힌 왜군은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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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7. (2-1)

종일 찬비가 내렸다. 왜군 몇 명이 거짓 편지를 보내왔다. 가토 기요마사가 서생포왜성에 있으니 조선군 장수 한 명이 함께 서생포에 가서 강화를 꾀하자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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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7. (2-2)

명나라 양호장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항복하면 상을 줄 것이라고 하고 되돌려 보냈다. 갈증에 시달려 성 밖 우물로 물 길러 나온 왜군 1백여 명을 생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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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8.

종일 찬비가 내리고 군사들도 동상에 걸리는 자가 많아 사기가 떨어졌다. 조명연합군의 기세도 한풀 꺾여 별다른 전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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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12.29.

권율장군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화공을 감행하고, 명나라 군대도 불화살을 쏘는 등 총 공격했으나 비가 쏟아져 중단하였다. 명나라 양호 장군이 장수 회담을 요구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1월 3일에 회담하자고 동의하였다. 가토는 구원군이 도착할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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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250131_225010795_03.jpg 말을 잡고 생고기 먹는 장면 (하단, 울산 왜성 전투도 중 일부)

1597.12.30.

왜군은 갈증에 시달린 나머지 말의 피를 마시고 자신의 소변을 받아 마시기도 하였다. 군량이 바닥나자 종이와 벽의 흙도 끓여 먹었다. 식량도 조총수에게만 지급되었고, 생쌀 한 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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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1.1.

태화강가 초가집에 불을 놓아 그 연기 속으로 배를 타고 왜성 안으로 진입하려 했으나, 우리의 전술을 알아차린 왜군이 포를 쏘아서 안타깝게 실패하였다. 왜군의 구원병이 남해안 각지에서 속속 서생포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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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1.2.

왜군의 구원병들이 서생포와 부산포를 떠나 울산으로 모여들었다. 이 소식을 듣고 울산 왜군의 사기는 올라갔다. 심지어 순천 왜성에서도 지원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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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1.3.

가토 기요마사는 약속한 회담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왜군 구원병이 속속 울산으로 모여들자 조명연합군은 다음날 최후 총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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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1.4.

조명연합군은 횃불을 피우고 포격을 가하면서 왜군을 성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총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대규모 왜군 구원병이 협공하자 조명연합군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숫적으로 왜군 측이 많았다.

20250125_142843.jpg 도산성 전투와 울산 왜성

제2차 도산성(울산 왜성) 전투(1598년 9월 22일부터 9월 25일)

조선에 제독 마귀는 별장 김응서, 선거이 등과 함께 조명 연합군으로 울산 도산성을 다시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조선 장수 선거이가 전사했다.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측은 2만 4000여 명, 별장 김응서(金應瑞) 측은 1만 5천 명을 이끌고 9월 21일 경주에서 울산으로 출발하였다.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어 연합군은 적에게 크게 타격을 주었고 조선인 포로 1천100여 명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귀는 명나라군이 사천성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를 결정하였다.


최종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은 후 철수령에 따라 울산왜성의 성채를 불태우고 퇴각하였다. 조명 연합군, 의병활약, 육지의 권율장군과 이순신장군의 노량진 해전의 승리로, 괴멸된 왜군은 패퇴하여 물러났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이 끝났다.

20250125_142910.jpg 조명 연합국 진영


<기타>

-. 수서역~울산(통도사) 역(SRT, 06:30~08:42, 20250125, 2시간 12분 소요)

-. 울산 시외버스 터미널~대구 서부정류장 (약 2시간 소요, 승차표 현장 구매)

-. 창녕 시외버스 터미널~대구 서부정류장 (약 40분 소요, 승차표 현장 구매)

-. 동대구역~수서역(SRT, 20:23~22:10, 20250126, 1시간 47분 소요)


<참고 자료>

-. 위키 백과

-. KBS 역사 스페셜, 임진왜란 최후의 승부처(https://youtu.be/QBshDvzH-M0)


글이 길어져 울산 서생포 왜성,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 창녕 박물관, 우포늪 편은 다음 회에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산 통도사, 울산왜성, 울산 서생포왜성 탐방기 몰아보기>

탑방기 연재 후, 아래와 같이 여행기를 모아 보았습니다. 참고하십시요!

1) 양산 통도사(通度寺) 탐방 : https://brunch.co.kr/@jylee2020/207

2) 울산 왜성 (蔚山倭城)과 임진(정유) 왜란 : https://brunch.co.kr/@jylee2020/208

3) 울산 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과 임진(정유) 왜란 : https://brunch.co.kr/@jylee202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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