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 울산왜성, 울산 서생포왜성 탐방(3)
울산 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의 천수각(天守閣)에서 회담 도중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사명당(泗溟堂)에게 물었다. "조선의 제일 보배가 무엇인가?"
사명당(泗溟堂)은 "당신의 머리가 조선의 제일 보배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설 연휴를 맞아 경남 양산 통도사, 울산 왜성, 울산 서생포 왜성을 탐방(2025.01.25. 토, 비)했다. 다음날(2025.01.26. 일, 흐림)은 경남 창녕의 교동 고분군과 ‘송현이 특별전시전’ 중인 창녕 박물관, 철새의 낙원 우포늪을 둘러보았다.
전회 통도사와 울산 왜성에 이어, 금회 주제는 ‘울산 서생포 왜성‘이다. 울산 서생포 왜성을 찾은 이유는 임진(정유) 재란 때, 왜군의 후퇴와 종전 과정이 궁금하였기 때문이었다.
울산역 안의 관광안내소 직원분에게 ’ 울산 왜성과 울산 서생포 왜성 중 어느 곳을 먼저 보면 좋을까요?‘ 하고 물어보았다. “역사성은 울산왜성, 성의 구조와 실물 관람은 울산 서생포 왜성“이라고 대답하셨다. 과연, 울산 서생포 왜성의 실체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순천왜성(2024.02.18 탐방, https://brunch.co.kr/@jylee2020/152)과 울산 서생포 왜성 탐방 소감을 미리 간단히 적어 본다.
-. 순천왜성은 내성은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는데, 외성은 파악 정리 중인 것 같았다. 외성 지도가 아직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외성 영역은 논과 과수밭등으로 사용되고 있어 발굴은 비교적 용이할 것 같았다. 주변 관련 역사적 시설물(충무사, 정유재란 역사공원, 검단산성 등)들은 정비가 잘 되어 있다.
-. 울산 서생포 왜성은 왜군들이 임진왜란 정유재란동안 장기간 활용하여 전체적인 내성 외성 규모는 지도로써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한 것 같은데, 외성 일대에는 이미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발굴에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 같았다. 진하해수욕장등 관광지들과 연관된 탐방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임진왜란 약사>
임진왜란(정유재란 포함) : 1592년 4월 13일~1598년 11월 19일(음력)
정유재란 : 1597년 8월 ~ 1598년 11월
제1차 울산왜성 전투 (1597년 12월 23~1598년 1월 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 1598년 8월 18일
제2차 울산왜성 전투(1598년 9월 22일~ 9월 25일)
순천 왜교성 전투: 1598년 9월 20일 ~ 10월 7일
사천성 전투 : 1598년 9월 20일~ 10월 1일
노량 해전: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전사)
남해왜성 소탕전: 11월 21일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 초기, 선조 25년(1592) 5월부터 선조 26년(1593)에 걸쳐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가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쌓은 왜성이다. 회야강과 포구를 이용하여 물자와 인력의 진출입 및 왜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하였다. 평지와 산지에 걸친 평산성(平山城)으로 1594년(선조 27)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한 곳이다. 종전 후,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왜성으로 사용되었다. 호를 포함한 면적은 15,180 m2 (호 제외 시 외곽 길이 2,500m )이다. 내성은 해발 133m에 동서 870m, 남북 370m 규모다.
울산왜성(학성공원) 탐방을 마치고 길 건너편 무지개 교회 앞 버스정류장에서 715번 버스를 타고, 약 40분을 달려 울산 서생포 왜성 정류장에서 오후 5시경 하차했다. 약간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때마침 비가 내리고 바람이 약간 불었다. 약 15분가량 걸어서 ’ 울산 서생포 왜성‘ 간판을 발견하고 본환을 향하여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참, 울산 아가씨들은 참하고 친절하고 착하다. 휴대폰 충전기를 사기 위해 마트에 잠시 들렀었는데, 매장 2층까지 찾아 올라와서는 제품위치를 정확하게 안내해 주었다. '울산 큰 애기'다.
문화해설사 사무실은 업무시간을 이미 종료하여 문을 닫았으며, 근처에 주민은 물론이고 관광객도 아무도 없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 좀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왕 왔으니 무작정 걸어 올라갔다. 성곽은 튼튼하게 지어져 있었고,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축성과정에 우리 조상들이 강제 동원되었다는 사실에 내내 가슴이 아팠다.
해발 133m 꼭대기에 왜성의 기본 형태인, 본환(本丸)을 구축하고 천수각을 세웠으며, 그 밑으로 이지환(二之丸) 구축하고, 이어서 삼지환(三之丸)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평지에는 외성 공간과 진하해수욕장 방향에 선박 접안구역을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이지환 공간에는 조선 성의 치(雉)를 모방한 구조물이 있었다. 문지에서 상대방을 3방향에서 공격할 수 있다. 진입하는 조선 병사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성내부 진입이 어렵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을이 있는 외성 구역에도 본환을 찌르는 방향으로 긴 창같이 기다란 성벽을 쌓았다. 해자를 여러 개소에 설치하여 탈환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본환은 동서 장방형의 성벽이 있고 내부에는 천수각(天守閣)과 장군수라는 우물터가 있었다. 3층 규모의 천수각은 남북 18m, 동서 17m, 높이 5m 규모였다. 광복 이후인 1963년에도 사적으로 재지정되어 그대로 유지되다가, 1997년 1월부터 사적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국가유산청의 권고로 1997년 10월 30일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현, 민속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되었다. 잊어버리고 싶은 역사지만, 현세와 후손들에게 각성과 스스로에게 경종을 울려준다는 의미에서 보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1593년(선조 26)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경상 좌수영 소속 서생포 수군만호진성(西生浦水軍萬戶鎭城)을 함락시킨 후, 인근 숙마성 등에서 가져온 돌로 성을 쌓았다. 이곳은 지리적으로 회야강과 포구를 접하고 있다. 임진왜란 · 정유재란 기간 중 왜군의 중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북쪽의 울산왜성과 남쪽의 임랑포왜성, 기장왜성, 동래왜성과 더불어 부산왜성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봉화로의 중심에 위치하여, 봉화성이라고 불렸다.
강화 교섭이 활발하게 진행된 1594년(선조 27) 4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서생포왜성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 회담을 하기 위하여 입성하였을 때 약 7,000명의 왜군이 주둔해 있었다. 1597년(선조 30) 12월 22일 57,000명의 조 · 명 연합군이 울산왜성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왜성에 입성하였다. 1598년(선조 31) 1월에는 고립된 울산왜성을 지원하기 위하여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왜군 2만여 명이 이 성으로 집결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울산왜성의 수비 책임자로 명령받고 울산왜성으로 긴급하게 올라갔다. 1598년(선조 31) 1월 22일에는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등 6명의 왜장이 서생포왜성을 지켰다. 1598년(선조 31)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였다. 1598년 11월경 울산왜성의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울산 서생포 왜성의 쿠로다 나가마사 등과 더불어 왜국으로 철수하였다. 조 · 명 연합군의 명장 마귀제독(麻貴提督)이 울산 서생포 왜성에 입성하였다. 곧 임진왜란 종전이 되었다.
왜군이 철수하면서 서생포왜성을 쌓을 때 동원된 많은 조선인들도 강제로 왜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야 했다. 쿠마모토성(熊本城)을 쌓는 데 동원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후손들 가운데 ‘서생’이라는 성씨로 구마모토 지역에 살고 있으며, 현재도 ‘울산‘역이라는 역 이름이 있다고 한다. 우리의 아픈 피눈물 나는 역사다.
울산 서생포 왜성 경내에는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53명의 충신 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신 창표당(蒼表堂)이 있었다. 초석과 기단 등을 비롯한 건물터를 확인하여 이를 바탕으로 현재 창표사가 복원되어 있다.
한편, 성 밖 동제당(洞祭堂)에는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운 마귀를 추모하고 마을의 주관으로 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조선에 귀화하여 여생을 보낸 편장군의 후손들이 세운 편장군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2017년 서생포왜성 주차장 부지 내에서는 해자 2개소가 확인되었다.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규모가 큰 왜성 중 하나다.
울산의 벚꽃 명소 중 하나이며 진하해수욕장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다. 진하해수욕장으로 유명한 진하리(鎭下里)라는 지명도 서생포진 아래 마을이란 근거에서 유래하였다. 성 위에 올라가면 진하해수욕장과 동해 바다가 아주 잘 내려다보인다.
선조 30년(1597) 12월 중순을 지나 성의 울산왜성 외곽 부분 완공된 직후, 울산왜성이 조명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서생포 왜성에서도 구원군을 보냈는데, 당시 회야강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 연합군에게 몰살당했다. 당시에 회야강을 일승강, 대승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임진(정유) 왜란 기간 중, 사명당과 가토 기요마사간의 4차례 회담이 이곳 울산 서생포성에서 열렸다. ‘울산역사문화대전’에서 찾아본 내용을 인용하여 간략하게 아래와 같이 적는다.
임진왜란 중 강화 교섭은 명과 왜 사이에서 이루어졌으며 조선은 제외되어 자세한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명의 제독 유정(劉綎)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상대로 하는 교섭을 시도하였고, 그 적임자로 사명당(泗溟堂) 유정(惟政)을 지명하였다. 사명당이 가토를 상대로 서생포 왜성에서 진행했던 강화 회담은 4차례였다. 이 중 3차례는 왜란의 소강상태 시기에 열렸고, 마지막 한 차례는 정유재란 초기에 열렸다.
두 사람은 여러 번 회담으로 어느 정도 상대방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1차 회담은 1594년(선조 27) 4월에 열렸다. 사명당은 울산 의병장 출신 이겸수(李謙受)와 장희춘(蔣希春) 등 20여 명을 대동하였다. 사명당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지시한 5개 항목의 강화 조건을 처음으로 알아냈다.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지만 왜군에 대한 정보 수집에는 성과가 있었다. 이겸수의 「여왜문답기(與倭問答記)」와 「적정탐지기(賊情探知記)」는 왜군에 관한 정보를 정리한 기록이다.
2차 회담은 1594년 7월에 열렸다. 사명당은 가토가 바라는 것이 조선 영토 4개 도(道)를 일본에 할양할 것과, 왕자를 일본에 인질로 보내 교린(交隣)을 성사시키는 데에 있음을 알았다.
3차 회담은 1594년 12월에 열렸는데, 이때 사명당은 가토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겸수 등이 가토의 진의가 강화 조건 5개 항 중 왕자 1명과 조선의 대신을 인질로 들여보낸다는 데 있음을 알아냈다. 가토는 1596년(선조 29) 5월 왜국으로 철수했다가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함에 따라 다시 서생포왜성으로 들어왔다.
4차 회담은 1597년 3월 18일에 열렸는데, 가토가 서울로의 북상(北上) 이전에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사명당을 부르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명당이 강화의 조건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강화 회담은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952년 임진왜란이 발생한 이후 울산 서생포왜성에서 일본과 조선 간에 4차례에 걸친 강화 회담이 있었지만, 강화를 이끌어내지는 못하였다.
4차례에 걸친 서생포왜성 강화회담은 명과 일본이 조선을 배제하고 진행한 강화 교섭을 저지하고, 왜군의 정세를 탐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가토와 강화론자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 사이의 갈등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 (출처 : 울산역사문화대전)
여담으로, 쾌지나 칭칭 나네의 유래가 다음과 같다.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가 패배한 뒤에 조선에서 도망(철수)하여 나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한다. “쾌재라, 청정이 나가네” 하던 것이 바뀌어 요즘처럼 ‘쾌지나 칭칭 나네’와 같이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생의 유래는 예로부터 왜구가 동쪽 왜국에서 건너와서 이 지역에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게다가 임진왜란 때 왜군들까지 침범했으니, 일종의 가슴에 새긴 경구다. 서쪽으로 도망가면 살 수 있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고, 자손들에게 가르치며 살아온 증거가 아닐까 생각하여 본다. 아프고 슬픈 우리의 역사였다.
<참고 자료>
-. 위키 백과
-. 울산역사문화대전
-. KBS울산 보물창고, 서생포왜성의 미스터리
https://youtu.be/g3MBiAw3Hbg?si=f1nw85M6lBSlz_GV
글이 길어져 경남 창녕 교동 고분군, 창녕 박물관, 우포늪 편은 다음 회에 글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양산 통도사, 울산왜성, 울산 서생포왜성 탐방기 몰아보기>
탑방기 연재 후, 아래와 같이 여행기를 모아 보았습니다. 참고하십시요!
1) 양산 통도사(通度寺) 탐방 : https://brunch.co.kr/@jylee2020/207
2) 울산 왜성 (蔚山倭城)과 임진(정유) 왜란 : https://brunch.co.kr/@jylee2020/208
3) 울산 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과 임진(정유) 왜란 : https://brunch.co.kr/@jylee20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