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노량, 죽음의 바다’를 관람했다. 이순신 장군의 최후와 치열한 근접 전투장면, 소금에 절여진 우리 조상들의 얼굴 그리고 순천왜성 전투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설날을 맞아 순천 여행할 때 순천왜성, 200m 지근거리의 충무사,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그리고 검단산성을 꼭 탐방하고 싶었다.
설날 순천 아지트에서 출발, 순천역 구내 관광안내소를 방문하여 안내책자를 받았다. 안내하시는 여성 두 분이 일본어로 된 팸플릿밖에 없다며, 미안해하셨다. 그분들 설명에 따르면 일본 관광객들이 가끔 방문하는데, 그들은 ‘순천성’이라고 부른다고 하셨다. 21번과 22번 버스가 그곳까지 간다고 했는데, 버스정류장 전광판에는 도착기미가 안보였다. 하루에 9회(21번), 4회(22번) 정도 운행하는 마을 노선버스였다. 하는 수 없이 택시 기사님 힘을 빌렸다. 12km 20분 거리(약 13,000원) 다.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관광지 안내표지판 앞에서 내렸다. 나도 모르게 긴장했다. 피냄새가 나는듯 오싹한 느낌을 받았다. 갈색바탕에 순천왜성(300m), 충무사(200m) 표시가 있었다. 천수기단 기준으로 넓은 주차장 우측에 갈대밭이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옛날에는 바닷물로 채워 조선과 명군의 접근을 어렵게 할 목적으로 만든 해자다. 정왜기공도권(1598년 10월경 순천 왜성 공격 장면을 명군의 종군 화가가 그린 전투장면)에 따르면 해자를 건너기 위한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순천왜성을 순천왜교(順天倭橋)라고도 부른다.
해자 외부에 외성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과수원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어 외성의 규모를 추정할 뿐이다.
다리는 갈대밭 옆 황토색 보행도로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출입 경비문인 문지 (門址) 1과 문지(門址) 2를 통하여 지휘소인 천수기단(天守基壇)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천수기단 (우측 사각형) / 해자(갈대 부분)와 문지 1
<탐방순서>
순천왜성(해자, 문지 1,문지 2,천수기단)>충무사> 정유재란역사공원> 검단산성
안타깝게도 검단산성은 옆지기의 긴급호출로 탐방은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아쉬워 잠깐 퍼 나르기로 대체한다. 돌아오는 차편은 검단산성 차고지 주차장에서 88번 버스를 타고 순천역에서 내렸다.
정왜기공도권(순천왜성 전투도, 좌측에 천수기단 5층망해루, 머리에 뭔가 쓴 군사-조.명 연합군)
순천왜성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왜성이다. 남해안 26곳 왜성 중 이곳 한 곳만 남아 있다. 순천왜성은 수륙 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120,595m²(36,480평), 외성 둘레 2,502m, 내성 1,342m로 외곽성(토석성) 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검단산성 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 다리가 물에 뜨게 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하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 말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 9월 경기도 부근 직산 전투에서 패한 왜군이 전라 경상 남해안으로 남하하여 각 지역 요충지에 성을 쌓았다. 호남지역을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 겸 최후 방어선으로 삼기 위함이다. 1597년 9월부터 11월까지 2개월에 걸쳐 치열한 2차례 전투가 있었다. 조명 연합군과 소서행장 사이의 최대 격전지였다.
해자 (갈대밭 부분)
해자(垓字)
본성과 외성 사이에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넓은 물길을 설치하였다. 바닷물을 유입하여 섬처럼 요새화하였다. 2007년 복원하였다.
문지 1
문지 (門址) 1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 출입문이다. 옆으로는 해자를 만들어 바닷물을 끌어들여 섬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하였다. 만조 때 이곳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인다고 하여 왜교(倭橋) 또는 예교(曳橋)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2007년 기존형태에 일본성 축조방식을 자문하여 복원하였다.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문지 2
문지 (門址) 2
천수기단에 이르는 주 출입문이다. 일직선으로 진입하지 않고 ㄱ자 형태로 꺾어 진입하는 구조다. 문지의 바깥쪽은 성벽이 남쪽으로 길게 연결된다. 성벽 서쪽 해자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문지 상단부는 큰 돌로 쌓아 위압감을 준다. 정왜기공도권에 문루와 성벽 위에 여장이 있다. 포 구멍을 벌집같이 낸 것처럼 그려져 있다.
천수기단 정면 / 천수기단 상단 바닥
천수기단(天守基壇)
성의 가장 높은 망루인 천수가 세워졌던 단이다. 앞에 낮은 단이 있다. 천수기단은 권위와 상징의 건물이었다.
정왜기공도권에 3층의 팔작지붕이 그려져 있으나 1층 아래에 5층망해루라고 쓰여 있어 5층으로 추정된다.
무너진 석축을 2007년 보수하였다.
천수기단 계단 / 5층망해루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았고, 쐐기질 하여 쪼갠 돌을 사용하였다.
쐐기질 흔적
쐐기질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어 3개월 만에 긴급 급조 완성한 흔적이 보인다. 천수기단에 올라서면, 4방을 볼 수 있다.
천수기단에서 본 주변 전경(현대제철 / 산업단지와 항구-광양 방향)
지금은 바다를 매립하여 공단이 조성되어 있어 주변이 바다였다는 흔적을 찾기 어렵다. 멀리 바다가 보이므로, 이곳이 한때 배가 드나들던 섬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충무사 / 검단산성
멀리 북쪽으로 충무사가 어렴풋이 보이고, 서쪽에 조명 연합군이 주둔했던 검단산성이 보인다.
정유재란시 성벽오르는 병사 / 정유재란 주요 전투
순천 왜교성 전투(順天 倭橋城 戰鬪)
조명의 연합군대가 4갈래(울산 1, 사천 1, 순천-2 육군 및 수로의 이순신장군과 명 해군)로 왜군을 공격하는 사로병진작전(아래 별도 설명 참조)이 펼쳐졌다. 1598년 8월 18일 후시미성(伏見城)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철군을 결정했다. 수세에 몰린 왜군들이 철군을 위하여 울산 사천 순천성 등에 진을 치고 있었다.
조명 연합군은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목표로 한 서로군(西路軍)을 편성하여 남진하였다. 아울러 이순신의 조선 수군과 진린의 명나라 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따로 편성한 다음 순천 왜교성(順天倭橋城)을 함께 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서로군 명의 제독 유정(劉綎)은 8월에 들어와 대군을 거느리고 한성(한양)을 출발하여 수원 전주로 내려온 다음 순천 왜교성을 공략하기로 하였다. 9월 19일 도원수 권율 장군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포함, 3만 6천의 병력이었다. 수로군은 1598년 7월 16일 고금도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과 명의 진린 수군이 합세하였다. 그리고 7월 24일 조명연합 함대를 편성하여 흥양의 절이도 해전에서 승리하였다. 9월 하순에 이르러 마침내 조명연합군이 연합 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10월 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뇌물에 매수된 명의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했다. 우선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장도에서 30여 척의 왜선을 격침시키고, 11척을 나포하였으며, 일본군 3,000명을 무찔렀다. 이것이 장도 해전이다. 그러나 조명 연합군의 피해 역시 컸다. 명나라 전선이 피해를 입었고 8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순천왜성에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왜군 1만 4천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바다에는 이순신장군이 버티고 있었다. 퇴로가 차단된 고니시는 사천의 시미즈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시미즈의 2만여 명이 순천왜성의 왜군을 구출하기 위해 출동했다. 조명 연합군 5만여 명(이순신장군과 명의 장수 진린 휘하 해군 1만 5천 명, 권율장군과 명의 유정 육군 3만 6천 명)과 격돌,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왜국으로 탈출을 시도하던 순천성 주둔 왜군과 사천의 시미즈 구원군이 노량진에서 이순신장군에 의해 괴멸되었다.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셨다.(노량진 해전)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났다.
충무사
순천 충무사(順天 忠武祠)
임진왜란(1592년~1598년)이 끝난 뒤 약 100년 후 주민들이 현재의 신성리 근처로 이주하였다. 코앞의 순천왜성 전투에서 많은 왜군들이 죽어 밤이면 원혼들이 자주 출몰하여 몹시 불안하였다. 논의 끝에 이곳에 사당을 짓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 뒤로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 1690년(숙종 16)에 인근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충무공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를 지내왔다. 1889년경에 주민들이 충무공 이순신의 사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여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
충무사 사당
한일병탄 후 1914년 신성리라는 지명으로 변경하였다. 1943년 가을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사당과 영정을 소각하였다. 1945년 조국 광복과 동시에 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가 설립되고, 1947년 현 위치에 사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후에 충무공의 군관 송희립 장군과 충장공 정운 장군의 위폐와 영정을 봉안하고 봄가을 제향하고 있다. 두 분 장군은 생사고락을 같이한 이순신 장군의 오른팔 왼팔이었다.
충무사 경내 / 배치도
정운(鄭雲) 장군(1543년~1592년)
1570년 28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웅천현감 등을 지냈으나 성격이 강직하고 정의를 지켰기 때문에 미움을 받아 몇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 장군 휘하에서 군관 송희립(宋希立)과 함께 출전하였다. 그 뒤 옥포(玉浦)·당포(唐浦)·한산 등의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고, 마침내 9월의 부산포해전에서 우부장(右部將)으로 선봉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부산포 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치른 4차례 부산지역 해전(옥포·당포·한산·부산) 중에서도 가장 치열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은 오른팔이었던 녹도만호 정운(鄭雲) 장수를 잃었다. 이순신 장군 연구자들은 “정운을 내어주고 부산을 얻었다”는 말을 한다.
송희립(宋希立) 장군(1553~1623)
1583년 별시로 치른 무과에 합격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녹도만호 정운의 군관으로서 영남해역에 대한 원병 파견을 주장했다. 거제에서 왜군을 격파하고, 옥포해전에서도 공을 세웠으며, 지도만호(智島萬戶)가 되어 형 송대립과 함께 이순신 휘하에서 활약했다. 송대립은 이순신 장군이 권율 도원수에게 천거해 창의별장(倡義別將)이 되어 활동했다.
1597년 7월에는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수행하여 남해안 여러 마을을 돌며 조선수군 재건작업에 나섰다.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적에게 포위된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을 구출했으며, 이순신이 탄환에 맞아 순국할 때 옆을 지켰다. 1601년 5월에는 양산군수, 8월에는 다대포 첨사를 제수받았다. 1611년(광해군 4)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
역사공원 평화광장과히스토리 월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
순천왜성에서 걸어서 순천시 방향 20분 거리(1.3km)에 있다. 국도 좌우측 매화나무에서 꽃망울을 터뜨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해룡면 신성리 옛 충무초등학교 자리에 있다. 한때 왁자지껄했을 교정은 학령인구 감소로 폐교되었고, 지금은 뒤편 언덕에 감나무들이 쓸쓸히 지키고 있다.
충무초등학교
순천 정유재란 역사공원 평화광장은 최후의 격전지 순천에서 정유재란과 민초들의 희생과 아픔을 승화한 조각상들이 있다. 특히 젖먹이 아기를 등에 업고 머리에 피난 광주리를 인 어머니의 모습과 주변의 조각상에서 우리 조상님들의 국난극복의 의지와 전쟁의 아픔을 느꼈다. 평화의 문구가 기록된 1,597개의 판석 그리고 정유재란의 기록이 담긴 히스토리월로 구성되었다. 정유재란의 전개과정을 한눈에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도올 선생은 정유재란이 재(再) 침입 전쟁이 아닌 정유년에 왜적이 침입한 새로운 전쟁이라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고 한다.
순천 검단산성
순천 검단산성(順天檢丹山城)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이곳에서 신성리 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과 공방전을 펼쳤다. 왜군 측에서는 조선산성(朝鮮山城)으로 불렀다. 도원수 권율(權慄)과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의 군사가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도(獐島)·송도(松島)에 진영을 둔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장군·명나라 도독 진린(陳璘)의 연합 함대와 함께 연락하면서 왜군을 격퇴했다.
해발 138.4m의 낮은 산이며, 여수반도와 순천 지역을 연결하는 길목에 있고 광양만이 눈앞에 보이는 요새다. 동쪽에 있는 순천왜성과는 직선거리로 2.5km 떨어져 있다. 성곽의 규모는 전체 길이 약 430m, 외벽 (추정 높이 약 4∼6m), 내벽 높이 2m 이상, 성벽 두께 5m 정도이다. 산성의 형식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산봉우리에다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이다. 성곽 내부의 시설물로는 문지 3개소, 건물지 3개소, 대형 우물지 1개소, 저장공 2개소의 유구와 기와류, 토기 및 철기류, 목기류, 석기류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참고>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줄거리
1592년 4월 13일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1년여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3~4년 동안은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됐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시 침공을 명해 일어난 전쟁이 1597년 1월부터 시작된 정유재란이었다.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은 백의종군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1597년 7월 22일 삼도수군통세사에 복귀했다. 이해 9월 16일에는 명량해협에서 13척의 판옥선으로 왜군 군선 130여 척을 물리쳤다.
명량해전의 패전 이후 왜군은 울산, 사천, 순천 등지에서 왜성(倭城)을 쌓고 버티었고, 대치와 전쟁 상황은 이어졌다.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일본에서는 전군의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가토 기요마사가 지휘하는 울산성,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에 집결된 일본군 병력은 본국으로의 필사의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이에 조명연합군은 동로, 중로, 서로, 수로의 네 개의 길로 일본군을 공격하는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수행했다. 이순신 장군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璘·1543~1607)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왜성 공격에 나섰다. 다급해진 고니시는 명의 진린에게 본국으로 돌아갈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고, 진린도 처음에는 이에 응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강력하게 이를 반대했고, 마지막까지 퇴각하는 왜군을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진린도 결국 이순신 장군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결전의 날 현재의 하동과 남해 사이를 흐르는 바다 노량바다에서 대전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 수군은 판옥선 200여 척과 1만여 명의 병력, 명나라 수군은 300여 척의 함선과 1만여 명의 병력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사천성에서 승리를 거둔 시마즈 요시히로가 500여 척의 함선과 2만여 명의 병력으로 고니시의 지원을 위해 출정했다. 고니시의 전함 300여 척과 1만 5000여 명의 병력이 합해지면서 왜군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해전사에서 가장 많은 함선과 병력이 충돌한 해전이다.
이순신은 명의 진린이 포위당해 위험에 처했을 때 일본의 대장선을 공격해 포위를 풀게 하는 등 최전선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격전 중에 일본군의 총탄에 가슴을 맞았지만,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며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 “전쟁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戰方急 愼勿言我死)”는 장군의 유언은 유성룡(柳成龍·1542~1607)의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다. 유명을 받은 장남 이회와 조카 이완 등은 끝까지 전투에 나섰다. 패주하는 일본 함선 200여 척을 격침시켰다. 바다를 통해 조선을 침략하려는 의지를 확실하게 좌절시켰다.
‘징비록’에는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 군영의 통곡소리는 마치 자신들이 어버이를 잃은 듯했다. 영구(靈柩)가 지나가는 곳곳에 백성들이 제사를 베풀고 따라다니며 ‘공께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공께서 우리를 버리시고 어떻게 가십니까?’라고 울부짖었다”라고 기록했다.
사로병진책략에 의한 전투와 해전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
정유재란 말기인 1598년에 입안한 왜군 격퇴 공세 전략이다. 정유재란 전투들은 모두 이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로병진책은 육군을 전라도 방면의 서로, 경상우도 방면의 중로, 경상좌도 방면의 동로 세 갈래로 나누고 여기에 해군이 맡은 수로를 더하여 네 갈래로 총공격을 가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했다.
동로군
한양에서 출발, 충주와 안동을 거쳐 경주에서 조명 연합군 합류하여 울산의 가토 기요마사를 쳤다(제2차 울산성 전투)
중로군
한양에서 출발, 청주와 상주를 거쳐 성주에서 남하,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를 쳤다(사천성 전투)
서로군
제독 유정이 한양에서 출발, 공주를 거쳐 전주에서 권율 장군과 합류하여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쳤다 (왜교성 전투)
수로군
명의 도독 진린, 등자룡이 충청도에서 출발, 전라도 남해안에서 이순신과 합류하여 배후에서 육군을 지원했다. 왜교성 첫 전투의 경우 서로군과 수로군의 손발이 맞지 않아 조명연합군은 3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종 결전인 노량해전에서 왜군을 궤멸시켰다. 일부 왜군은 탈출하였다. 안타깝게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셨다. 사로병진이 마무리된 이후 남해도의 잔류 왜군을 소탕(남해왜성)함으로써 정유재란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