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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10. 2023

순천 송광사  탐방

보조국사와  법정  스님을 찾아서

송광사 전경 (출처 : 송광사 홈페이지)


순천 송광사 (順天 松廣寺)     

조계산 도립공원 안내도

   담양 소쇄원(https://brunch.co.kr/@jylee2020/126) 탐방 후(10월 2일, 월) 순천 송광사와 낙안읍성(https://brunch.co.kr/@jylee2020/128)을 돌아보기로 했다. 광주에서 다음 순회지 송광사까지 농어촌버스(217번, 약 70개 정류장, 2시간 소요)로 이동하기로 했다. 문제는 광주-송광사간 교통편을 자세히 파악하지 못한 부주의로 약 2시간을 헤맸다. 택시기사님의 귀중한 정보로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직행버스를 타고 곡천에서 하차 후, 택시로 송광사에 오후 4시경 도착하였다.      

송광사 안내도

   송광사에서 낙안읍성 가는 마지막 버스가 오후 5시 30분 발차. 실재 여유, 1시간 내에 송광사 관람을 마쳐야 했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해 관람 후, 낙안읍성 행 63번 버스를 탔다. 허둥지둥 저돌적 무계획 여행에 자책을 하였다. 그 여파로 며칠 후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하마비 / 비림

   송광사 면적은 44,297㎡, 전남 순천시 송광면 송광사안길 100, 조계산 서쪽에 있다. 동쪽에 있는 선암사가 어머니 같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산사라고 한다면, 송광사는 승보 사찰로서 아버지 같은 엄격한 기품이 느껴졌다. 산문을 지나니 하마비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송광사 국사 16분을 기념한 비림을 지나 일주문에 들어섰다.

일주문 / 고향수

   보조국사 지눌 대사가 처음 송광사에 올 때 짚고 왔던 향나무 지팡이를 땅에 꽂자 잘 자랐다. 입적할 때 같이 말라죽었다는 고향수(枯香樹)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 우화각에 들어섰다.      

우화각 / 종고루

  개울을 가로지르는 우화각을 통과해 사천왕문과 종고루를 지나니, 넓은 마당을 품은 대웅보전이 나타났다. 그 중심으로 수십 채의 전각이 체계적이고 빈틈없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침계루 / 육감정

   맑은 개울을 베고 있다는 침계루와 육감정이 그중에 자연스러운 편이었다.

보조국사 감로탑 / 계단

   특히 높은 돌계단 위에 위치한 보조국사 감로탑에서 탑을 두 팔로 감싸 안고 기도드리는 노신사 부부의 평온한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다음번 탐방 때는 좀 더 시간적 여유를 갖고 둘러보기를 기대해 본다.    

 

1. 송광사 연혁(송광사 홈페이지 참조함)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한자풀이와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첫째, 18명의 큰스님들이 나셔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곧 '송(松)'은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는 것을

가리킨다.    

국사전 뒷등 쪽(추정)

   둘째, 보조 국사 지눌스님이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일찍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고 그에 유래해서 송광산이라 했으며,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     


   신라말 혜린(慧璘) 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송광산 길상사(吉祥寺)였으며 100여 칸쯤 되는 절로 30, 40명의 스님들이 살 수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절이었다. 이후 버려지고 폐허화된 길상사가 중창되고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정혜결사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부터이다.


   지눌스님은 9년 동안(명종 27년 1197년 ~ 희종 원년) 중창불사로 절의 면모를 일신하고 정혜결사운동에 동참하는 수많은 대중을 지도하여 한국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송광사가 한국불교의 중심으로 각광받기 시작하였다.  


2. 승보사찰 (僧寶寺刹, 송광사 홈페이지 참조함)

   한국 불교에는 일찍부터 세 가지 보배를 가리키는 삼대 사찰이 있고 이를 삼보사찰(三寶寺刹)이라고 한다. 송광사는 한국불교의 승맥(僧脈)을 잇고 있기 때문에 승보사찰이라고 한다. 통도사에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불보사찰(佛寶寺刹), 해인사( https://brunch.co.kr/@jylee2020/199 )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의 경판이 모셔져 있기 때문에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한다.    

  

대웅대전

      세 가지 보배인 삼보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내면화되어 바로 우리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참마음을 가리킨다. 원효스님께서도 "돌아가는 바 그 하나인 마음(一心)이 바로 삼보인 것이다"라고 확언하고 계신다. 곧 우리들 본래의 마음이 다름 아닌 부처요 진리며 승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 승가야말로 불교를 받치는 세 기둥이요 불교를 불교이게 하는 세 가지 요소이다.      


3. 주요 큰 스님

보조국사 지눌 (다음 사이트)

1)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고려)

   8세에 출가, 1190년 팔공산 거조암에서 정혜결사운동, 1200년 송광사로 대중을 이끌고 들어와 11년 동안 진각국사등 많은 제자를 길러내 불교의 중흥과 선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중국불교에서 한국인의 근기(根基)에 맞게 독자적으로 체계를 세운, 한국불교 사상사에서 위로는 대각국사와 아래로는 조선 초기 태고국사와 더불어 가장 빛나는 업적과 영향을 끼친 분이다.      


   불교는 왕건이 고려의 개국과 함께 국교로 지정하고 적극적인 후원과 기대로 귀족화 되었으며, 스님들은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불교계 모두가 시대에 편승하여 안위를 택했지만 지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하여 지금의 조계산 송광사에 정혜사(후에 수선사)를 정한 후, 민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철저한 수행과 수도로서 포교에 힘쓰면서 정치·권력·안락을 과감히 버렸다. 정혜사에 지눌의 수행과 수도력으로 민중이 대거 몰리자 자신의 수행에 본분을 잊을까를 걱정하며, 홀연히 몸에 지닌 가사 1벌 만을 가지고 산속에서 뼈를 깎는 고행을 하였다.       

법정 스님과 의자 (다음 사이트)

2) 법정스님(1932~2010)

   1932년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났다. 박재철로 살았다.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전남대 재학 중 출가를 했다. 무엇보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자는 사회운동으로 승화시켰다. 무소유를 실천하며, 무소유로 살다가, 무소유로 갔다. 스님답게 살다가 스님답게 갔다.  

   

   송광사입구로부터 도보 30분 거리 불일암에서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17년 생활했다. 여기에서 '무소유'를 시작으로 '산방한담', '물소리 바람소리'등 많은 책을 썼다고 한다. 생전에 오가던 이 길이 '무소유 길'로 이름 붙여져 있다. 그의 가르침이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

무소유 길

   2010년 열반한 법정스님은 불일암 앞마당 후박나무 아래에 잠들었다.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라고도 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내려놓는 것'이라고 했다.


4. 중요문화재

<주요 국보 및 보물>

성보 박물관

   큰 절임에도 불구하고 3가지 풍경과 석탑과 석등이 없다. 풍경이 없는 이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스님들의 공부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석탑과 석등이 없는 이유는 송광사 터가 연화부수형으로 무거운 석탑을 세우면 가라앉는다는 의미 때문이라고 한다.  송광사 성보박물관에는 목조삼존불감등 국보와 전남도 지정문화제 2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목조삼존불감 (문화재청)

1) 목조삼존불감(木造三尊佛龕, 국보)

   국보(1962.12.20 지정). 불감이란 휴대용 법당을 말한다. 높이 13.9cm, 지름 69cm. 보조국사가 지니고 다녔던 것으로 전단향나무로 만들었다. 전개식(展開式) 삼면 불감으로, 닫으면 머리 부분이 원통형이 된다. 중앙 반원부에 석가여래, 왼쪽 감실에는 보현보살, 오른쪽에는 문수보살이 조각되어 있다.       

혜심고신제서(문화재청)

2) 혜심고신제서 (惠諶 告身制書, 국보)

   진각국사 혜심(1178~1234) 스님에게 왕명으로 중서문하성에서 대선사로 임명한 두루마리 형태의 문서이다. 고려 고종 3년(1216)에 조계산 송광사 제2세 진각국사에게 대선사의 호를 내릴 것을 제가(制可) 한 것이다. 홍, 황, 백색 등의 비단 7장을 이어서 만든 두루마리에 묵서 한 것으로, 크기는 가로 3.6m, 세로 33㎝이다.      

티베트문 법지(문화재청)

3) 티베트문 법지(法旨, 보물)

   송광사 16 국사 중 제6세인 원감국사가 충렬왕의 명을 받고 원나라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로부터 받아온 것이라 전해진다. 송광사 티베트문 법지는 고려시대 원나라와의 활발했던 불교교류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내용은 ① 문서의 소지자에 대한 신분과 신분보장 ② 신분을 보장해 줄 자들에 대한 명시와 협조요청 ③ 문서 발급자의 증명 부분 등이라고 한다.     

경질 (문화재청)

4) 경질(經帙, 보물)

   두루마리 형태의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보자기다. 대나무를 0.45*1mm로 쪼갠 후 색실로 엮어서 직사각형 모양의 발을 만든 것으로 2점이 있다. 비단을 두르고 뒷면에는 종이를 발랐다. 1278년경 경패와 함께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경패(문화재청)

5) 경패(經牌, 보물)

   경패는 대장경을 보관하는 나무상자에 경전의 이름을 기록하여 매달아 놓는 인식표이다. 표면에 액(額)을 만들어 불경의 명칭과 번호를 새겼다. 1278년 제6세 원감국사(1226~1293)가 강화도 선원사에서 거란본 대장경 1,000여 책을 송광사로 이안할 때 사용한 대장경 분류 표지 패로 보인다. 앞면은 경전이름, 뒷면은 보살. 나한.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다.      

금동요령 (문화재청)

6) 금동요령(金銅搖鈴, 보물)

   요령(搖鈴)은 불교의식을 행할 때 흔들어 소리 내는 도구로서 높이 20.6㎝, 지름 6.6㎝의 도금한 청동제이다. 몸은 4 각형이고 각 면이 팽창되어 둥근 형태를 하고 있다. 몸 위에는 마디가 하나 있는 긴 손잡이가 있다. 화려한 용 문양과 당초문이 4면에 모두 양각되어 있다.     


<주요 건물>

사천왕상

1) 사천왕상 (보물)

   조성왕은 수미산 중턱에서 각각 그들의 권속들과 살면서 동서남북 네 방위를 지키며 불법 수호와 사부대중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1628년 4구의 사천왕상이 봉안되었다. 2004년 보수과정에서 다량의 복장유물이 발견되었다.     

응진당 (문화재청)

2) 응진당 (전남 유형 문화재)

   석가모니부처님과 16 나한을 모시는 전각으로 3칸의 맞배집이다. 1504년 처음 지어진 이후로 지금까지 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내부에 모셔진 석가모니 후불탱과 16나한탱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전

3) 관음전

   본래 성수전이라 하여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51세)을 맞아 사액된 왕실 기도처로 1903년 건립되었다. 1957년 성수전 앞에 관음전을 해체하면서 관음보살상을 이안하고 한국전쟁 복구불사 천일기도 이후 계속해서 천일기도가 이어지고 있는 기도처이다.     

하사당 (문화재청)

4) 하사당 (보물 제263호)

   1461년 창건된 승방으로 정면 3칸의 주심포 맞배집이다. 단아한 외형과 화려했던 단청의 흔적, 독특한 환기공 등을 갖추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요사채다.    

 

국사전 (문화재청)

5) 국사전 (국보)

   지눌 스님을 비롯한 송광사 16 국사 진영을 모시고 있다. 국사들은 모두 의자에 앉아 있으며, 가사와 장삼을 수한 모습을 하고 있다. 내부의 연꽃무늬로 장엄한 천장은 건물 안쪽에 걸쳐 우물정자를 하고 있다.     

영산전

6) 영산전 (보물 제303호)

   석가모니 부처님과 부처님께서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 부처님 일대기를 표현한 팔상도를 모신 전각이다. 1639년 중창하였으며 내부에 모셔진 후불도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약사전 (문화재청)

7) 약사전 (보물 제302호)

   약사여래부처님을 모신 전각으로 1637년 소실된 것을 1640년에 중창한 것이다. 사방 1칸으로 송광사에서 가장 작은 불전이며 대들보가 없이 공포만으로 짜 맞춘 천장이 독특한 건물이다.

    

5. 송광사 3대 명물

비사리구시

1) 비사리구시

   절에서 큰 재(大齋)를 모실 때 사찰로 모여든 대중을 위해 밥을 짓는 취반소(炊飯所)에서 사용한 나무로 만든 대형 용기다. 커다란 나무 밥통으로 쌀 7가 마분, 4 천명분의 크기다. 길이가 17자요 높이가 3자이고 너비가 4자다.      

능견난사 (문화재청)

2) 능견난사 (能見難思, 전남 유형문화재 제19호)

   법땅에서 공양물 올릴 때 음식을 담는 데 사용하던 접시이다.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중국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한다. 조선 숙종이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명했지만 도저히 똑같이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뜻에서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쌍향수 (문화재청)

3) 쌍향수 (雙香樹, 곱향나무, 천연기념물 제88호)

   송광사 기준으로 불일암 반대편 약 3.5㎞ 떨어진 산중턱 천자암에 있는 향나무다. 800여 년 되었다. 높이 12.0m, 가슴높이 둘레 4.10m, 3.30m이다. 두 그루가 쌍으로 나란히 서 있고 줄기가 몹시 꼬인 신기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와 제자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짚고 온 지팡이를 나란히 꽂은 것이 뿌리를 내리고 자란 것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 나무가 다른 나무 쪽으로 살짝 기운 모습이어서 사제 간의 예의를 상징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참고 자료>

-. 송광사 팸플릿

-. 나무 위키

-. 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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