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 년 전에 한번 와 보았었는데, 동문 외곽 오른쪽에 3.1절 기념탑과 왼쪽에는 1970년대에 발행되었던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창간자 한창기 선생의 소장품들이 전시된 순천시립 뿌리 깊은 나무 박물관등이 새로 생겼다.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내리에 소재한 읍성이다. 읍성 내에 초가집 가옥들은 몇 백 년을 이어오며 현재까지도 실제 주민들이 한복을 입고 생활인으로서 거주하고 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의 드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해 있다. 남쪽에 바다가 있다. 들판 한가운데에 쌓은 평지성이다. 축성 연대와 지리적 위치로 보아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의 출몰에 대비한 읍성 축조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낙안읍성 가을밤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방계획도시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읍성 중의 하나이다. 읍성 중에서 조선 한양도성의 입지조건과 가장 닮아 있다고 한다. 성 안 마을은 조선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적인 면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해질 무렵 서남쪽 성곽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읍성 주변 풍경과 성내 민가 가옥들의 정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치(성)과 해자(동문 쪽)
성곽의 길이 1,410m, 높이 4~5m이며, 면적은 223,108㎡이다. 성내에 98세대 228명이 살고 있다. 부속 시설물로는 성문(동 서 남문) 3개, 옹성 3개, 치 4개(동문 쪽), 해자(동문 쪽과 남문 일부)와 객사 및 동헌 등의 건물을 갖추고 있다. 성내의 도로는 3개의 성문을 잇는 T자형의 도로망을 갖추고 있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의 대부분의 읍성과 성문 중 온전하게 남은 것은 남문과 동문이며, 서문은 출입구만 남아있고 문루는 없다. 성문의 바깥쪽에는 다른 읍성에서는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ㄱ자형 옹성을 가지고 있다.
1397년(태조 6)에 낙안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토성으로 쌓았다. 1424년(세종 6)에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했다. 정유재란 당시에는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폐허가 된 읍성은 1626~1628년(인조 4~6) 무렵에 낙안군수로 있던 임경업 장군에 의해 복구되었다. 2011년 3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3. 주요 건물 장소
1) 성문
성벽 위 순찰로(보행길) 양 옆에 벽이 없어, 주민 및 관광객의 추락방지를 위한 시설이 시급하다. 여장(성가퀴)이 없기 때문이다. 발밑을 조심해야 한다.
성벽 위 순찰로 (여장 설치등, 추락 방지 시설 긴급 요청됨) / 담뱃불 조심!
전구간 순찰로에서 적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신체가 노출되어 아군의 손실이 예상되었는 데, 왜 여장등 보호벽이 없을까 계속 의문을 품었다. 허물어졌다면, 하루속히 다시 세워야 할 것이다.
동문(낙풍루)
-. 동문(낙풍루)
주요 출입문이며, 봄을 상징하고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닌 낙풍루는 정문처럼 사용되었으며 왜구의 침입을 막기 옹성을 쌓고 4개의 치(성)을 설치하였다. 치(성)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다.
동문 앞 석구와 해자
석구 (石狗)
동문 낙풍루 돌다리 앞에 석구(개 모양) 조각상 3개가 서 있다. 오봉산 일대에서 다수의 왜구가 참살되었는데 그때 죽은 귀신이 읍성 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남문 (쌍청루)
-. 남문 (쌍청루)
빈길등에서 성곽길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면 남문이 있다. 외곽에 초가지붕 민가가 있다. 담뱃불을 던지지 말라는 경고판이 놓여 있다. 추락방지 표지판 설치도 시급하다.
남문 옹성
출입문 주변에 ㄱ자 옹성을 쌓았다.
-. 서문(낙추문)
유일하게 문루가 없다. 서문 매표소가 있다.
임경업 장군 비각 (출처 : 한국향토문화대전)
2) 임경업 장군 비각
낙안군수 임경업장군은 낙안읍성을 보수하고 중국 청나라와 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것과 백성을 위해 선정을 베푼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동헌(죄인 심문)
3) 동헌(별감)
지방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중앙 마루에서 송사를 다루었다. 사무당(使無堂)이라고도 불렀는데, 사무란 고을 수령이 권력을 남용하거나 백성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담을 사이에 두고 수령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내아가 있다.
낙민루
동헌의 출입문 상단에 낙민루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마당에는 죄인을 심문하는 형틀이 놓여 있다. 직접 체험할 수 있다.
4) 객사
고을의 으뜸가는 건물로 중앙관리나 사신들의 숙소이다. 관아의 수령이 매월 초하루 보름이나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에 절하는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옥사
5) 옥사
판결 후 죄수들이 지내는 공간이다. 불빛이 없어 으스스했다.
빈길등(좌우측 숲)
6) 빈길등
성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속으로 아름다운 장소다. 성을 처음 축조한 김빈길의 이름을 따서 빈길등(빈기등)이라고 한다.
7) 기타
은행나무 (출처 : 한국 향토문화전자대전)
-. 은행나무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이 낙안에서 의병과 군량미를 모아 좌수영으로 돌아가기 위해 은행나무 아래를 지날 때 마차 바퀴가 빠졌다. 수리 후 어떤 다리를 지나가야 했는데, 그 다리가 붕괴되어 있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붕괴된 시간을 전해 듣고 깜짝 놀랐다. 만약 마치 수리를 위해 잠시 멈추지 않았었더라면 횡액을 당했을 시간이었다고 한다. 은행나무 목신이 장군을 위해 조화를 부린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큰샘 빨래터와 물레방아
-. 큰샘 빨래터
동네의 아낙네들의 쉼터 빨래터다.
호박과 도예방
이웃 담벼락에 큰 누런색 호박이 돌담 위에 얹혀 있다.
난전
-. 난전
옛날 5일장 시장통에 관광객들이 식사와 간식을 먹을 수 있는 점포가 들어서 있다.
연지
-. 연지
냇가에 족대로 물고기를 잡고 있는 소년상이 있다. 어릴 적 시골의 나를 보는 듯했다.
4. 외곽
성 밖에는 근래에 생긴 조형물 및 건축물이 새로 생겼다.
3.1 공약 3장
-. 3.1절 기념탑
1919년 3월 1일 운동 당시 낙안향교 유림들과 지역민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빈길 장군 (출처 : 광주일보)
-. 김빈길 장군 동상
낙안면 옥산마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고려 후기 이성계 장군 휘하에서 왜구를 격퇴하였다. 1397년에 낙안에 토성을 쌓고 왜구를 막았다. 서민풍의 후덕한 장수로 병에 걸린 병사는 정성껏 치료해 주고, 추위에 떠는 병사에게는 옷을 벗어 입혀 주었으며,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배고픈 병사가 없게 하였다.
순천시립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 (출처 : 두근두근 순천여행)
-. 순천시립 뿌리 깊은 나무박물관
전남 벌교출신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1936~1997) 선생의 유품과 6,500점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 수오당
단소 명인 김무규 (190~1994) 선생의 고택으로 서편제 한 장면을 담은 장소이다.
-. 석물 공원
무인석, 문인석, 동자석, 석수, 석탑 등 200 여기의 석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5. 체험 및 공연
도예 체험
-. 전통 생활 재현 체험
길쌈, 놋그릇 닦기, 유서 쓰기, 전통혼례, 맷돌체험, 농촌체험, 놀이마당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 일일 상설 체험
국악, 대장간, 천연염색, 짚물공예, 명예별감, 서각, 가야금을 연주하는 장소가 있다.
-. 주말 상설 공연 (매주 주말 11:00~12:00 / 15:00~16:00)
주말에 판소리, 기예무단, 기악, 가야금, 사물놀이를 한다.
-. 축제
정월대보름 축제, 전국 국악대전, 가야금 병창 경연대회, 순천 낙안읍성 민속문화 축제 등이 열린다.
낙안읍성 버스정류장 / 순천대 앞
6. 교통
시내버스로는 순천시내 - 낙안을 최단거리로 이동하는 63번, 68번을 타면 순천역 기준 40분 내외가 소요된다. 61번이나, 16번의 경우는 많이 우회해서 간다. 친절하게도 16번 기사님이 정류장에서 차를 세우더니 순천까지 좀 멀리 돌아가도 타겠느냐고 물어 왔다. 앱을 보니 곧 68번 버스가 올 것 같았다. 고마웠다.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그렇게 소쇄원, 송광사, 낙안읍성 탐방을 무탈하게 마무리했다. 68번 버스는 타는 승객이 없어 계속 정류장을 스치듯 휘청거리며 지나갔다. 캄캄한 어둠 속을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