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리 Oct 31. 2023

산책의 하모니

나무와 사람과 강아지의 화음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높고 오래 산 나무들과 낮고 어린 나무들이 함께 공생하고 있었다. 산책하는 길에 이 아파트 단지의 나무들을 보며 나는 이 글을 수필로 쓸지 소설로 쓸지 고민했다. 아마 그건 지금 완성된 글을 읽고 있는 사람과 미래의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의 사실을 더 많이 쓰면 수필이고 거짓을 더 많이 쓰면 소설이니까. 그저 그 차이일 뿐이니) 갑자기 문득 글을 쓰고 싶다 생각한 건, 그 나무들이 각자 보내는 음들의 하모니 때문이었는데, 우거진 나무들과 여리고 어린 나무들은 각자 이 아파트 단지에서 굽은 등으로 유모차를 끌며 열심히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노인들과 유치원 버스에서 폴짝 뛰며 엄마에게 안기는 아이를 떠올리게 했다. 그 순간의 공생에 대해 쓰고 싶었다.


이 아파트를 나의 강아지와 둘이서 도는 건 내가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다. 10년 정도 산 아파트인데 가끔은 너무 익숙하고, 가끔은 너무나 낯설다. 마치 오늘 입주한 그때 그 마음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는 아파트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마치 내가 나무가 된 것처럼. 그곳에서 지나가는 노인들과 아이들과 그 중간쯤 되는 사람들을 나무의 시선으로 오래도록 보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결국 나무가 아닌 사람이 될 터였다.


내 옆에서 네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가는 나의 강아지는 내가 한 눈 판 사이, 슬쩍 날 옆 눈으로 보고는 하면 안 되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 (한 눈을 팔아도 제3의 눈은 그녀의 동태를 계속 살펴야 한다. 이 바쁘고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산책이여) 강아지가 할 수 있는 말 짓거리는 땅에 있는 더러운 것을 먹거나, 비비거나, 냄새를 맡거나, 입으로 물고 던지는 정도인데, 이건 견주가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다. 이렇게 글로 쓰니 별 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산책하는 중에는 그걸 신경 쓰는 뇌가 제일 활발하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을 최대한 좁게 만들어 지나가는 이웃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내 강아지는 중형견이기 때문에 그런 걸 더 신경 쓴다. 내 눈에는 귀여운 아가일뿐이지만 나와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뚱뚱하다’ ‘크다’ ‘다리가 짧다’ ‘꼬리가 없다’이다. 물론 사람들마다 반응들은 다르지만 가장 밑바닥의 시선으로 내 강아지를 케어한다. 그럼 문제가 없겠지 생각하며.


나처럼 내 강아지도 우리 아파트에 심어져 있는 나무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네 다리로 열심히 걸으며 뛰며 나무들이 우거진 곳을 일부러 찾아간다. 그런 곳에 꼭 있는 벤치에 폴짝 뛰어올라 공기 중에 냄새를 쓱 맡는다. 특유의 행복한 표정으로. 안녕? 오늘 하루도 잘 부탁해. 이런 표정이 랄까. 나도 그런 표정으로 주변을 보려고 노력하지만 강아지에 비해 나무와의 교감은 턱 없이 부족하다. 강아지가 우리보다 잘하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많다. 함께 있으면 대체 우리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싶을 때가 많다.


글을 쓰다 보니 사람보다는 강아지에 대해 많이 쓰게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 내 강아지는 동물 이상의 사람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고 나의 3년 산책 메이트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그러므로 동물과의 교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은 함께 산책하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읽어주길 바란다.


3년 전까지는 혼자서 아파트 단지 산책을 나섰다. 그때 항상 내 옆에 함께 있던 건 책이었다. 책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여름이나 늦여름, 가을 초입쯤에 살랑거리는 나무 밑에 앉아 책을 읽어나갔다. 그냥 상상했을 때, 이 녀석 보통 허세가 아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가장 돈이 들지 않고 행복을 느끼는 나만의 방법 중 하나다. 그곳에서 글을 읽으며 바람 냄새와 감촉, 나뭇잎들이 떠는소리를 느끼고 있노라면 정말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한번 실천해 보시길 추천드린다) 그러다 강아지를 산책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에 있던 시선을 옮겨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곤 했다. 나와는 달리 하나도 외로워 보이지 않았으니까.(사실 부족함 없다 말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언제나 외로움이 존재한다)


강아지를 산책할 수 있는 요즘에는 책을 못 읽는다. 모든 것에는 등가 교환의 법칙이 있는 거다. 물론 전혀 외롭지 않다. 난 외로움과 독서를 교환했다. 후회되지 않는 교환이었다 자부한다.


할머니들이 노인정을 열심히 가며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눈다. 그 소리와 분위기는 현재의 나는 절대로 낼 수 없는 어떤 여유로움과 삶에서 해야 하는 모든 일을 다 끝냈다는 후련함이 느껴진다. 나는 내가 할머니가 된 순간을 생각하고 그린다. 분명 지금보다는 행복할 것 같다. 아닐 확률이 많겠지만 아직 실행되지 않은 미래에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많기에 상상의 즐거움을 즐긴다.


할머니들이 멀어지고 유치원 버스가 도착한다. 유치원 버스에서 폴짝 뛰어내린 내 강아지 친구 웰시코기처럼 짧은 다리와 팔을 가진 아이들이 손을 쭉 뻗어 엄마의 손을 잡고 그 옆 놀이터로 향한다. 엄마들은 엄마들끼리 벤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거나 막대기로 땅을 두드린다. 각각의 시대가 있고, 각각의 아름다움이 공존한다. 그 누구도 터치하지 않고 각자의 시대들이 뒤엉켜 내는 하모니의 순간을 나무의 눈으로 즐긴다. 나의 몸은 그 순간 투명해진다. 내일이 되면 아이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크고 노인들은 더 여물어가겠지. 그곳에 나의 존재를 지워본다 그리고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마치 그저 우뚝 솟은 나무처럼.

-20.10.15 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