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졔리 Dec 05. 2023

신라의 밤



신라의 밤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빠르고 안정적인 것이었다. 우리 친구 셋은 경주 여행을 앞두고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KTX를 타고 바깥 풍경을 훑고 있었다. 물론 그 안에 각자가 품고 있는 마음들은 서로 다를 것이 분명하였다. 어떤 이는 최근 헤어진 남자를 생각하겠고, 누군가는 어제의 고단함에 대해서 또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천천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기차에서는 저마다 생각의 소음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보기 중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생각하는 쪽이었는데, 뒤에는 아침부터 기차에 몸을 실은 고단함을 조금 벗어나기 위해 눈을 감은 갱이 있었고, 옆에는 탔을 때부터 나갈 때까지 수정 화장을 두 시간여 한 밍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왜인지 뷰러가 계속 들려있었다.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이곳 경주에 왔을까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이 기차의 속도만큼 빠르게 지나갔다.

 신경주역에서 내리자마자 사건이 시작되었다. 얼마 전에 산 장갑을 잃어버린 것이다. 친구들은 일본 제품을 산 나를 오히려 뭐라고 하며 오랑캐 취급을 했다. 내 물건을 내가 잃어버렸는데도 난 일본 제품을 샀기 때문에 위로보다는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사실 이렇게 물건을 잃어버린 게 나에게는 낯선 상황이 아니었다. 우산, 핸드폰, 지갑, 장갑 수많은 물건들이 나의 손을 거쳐 어딘가 자신의 원래 있던 곳으로 가버렸다. 친구들은 이런 나의 모습을 10년 넘게 본 이들이라 안타까움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표정들이었을 것이다. 한숨이 나올 만했다. 나도 깊이까지는 아니고 어쨌든 나름의 반성을 하며 숙소로 향했다.

 숙소를 가는 길에 우리는 욘을 만나야 하는 미션이 있었는데 (완전체 4명이 된다 곧) 욘은 남자 친구와 아침부터 도착해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데이트를 즐겼다 했다. 욘의 남자 친구를 우리는 우리의 숙소(한옥집 대문) 앞에서 잠깐 만났는데 여행지에서 만나 그런지 괜히 반가운 친구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완전체가 된 우리 넷은 한옥집의 노곤함과 운치를 즐기며 잠시 우리가 묵을 방에 앉거나 누워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졌다.

어쩌다 보니 이번 여행의 계획은 내가 짜게 되었는데, 나머지 세명은 이제 슬슬 다음 코스로 이동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왜 인지 [절전모드] 라도 된 듯, 이 방에서 아무것도, 아무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았는데, 아마 쉬지 않고 일해 온 나에게 몸이 보낸 명령일 것이다. 새로운 장소, 편한 사람들과 함께 하니 몸과 마음이 모두 나른해져 버렸다.


하지만 슬슬 배가 고파지면 포악해지는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 내가 움직여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의 숙소는 우리 여행의 목적지인 황리단길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먹을 곳은 풍족했다. 하지만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바로 ‘료코’라는 곳인데, 몇 개월 전부터 인스타를 보며 너무나 가고 싶어 내가 체크해 놨던 맛집이었다. (나에 대해 모르는 분들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저는 인스타의 노예이자 어떤 곳을 사진을 찍기 위해 가는 이해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착한 친구들은 기꺼이 나를 따라주었다. 우린 걸으며 동영상도 찍고 사진도 찍으며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리고 2차 위기는 갑자기 또 우리에게 찾아왔다. 료코에서 꼭 먹어야지 했던 도시락 메뉴가 작년에 종료되었다는 거다. 이 도시락을 찍지 못하면 여기 온 이유가 있을까? 잠시 멘붕에 빠졌다. (나만) 이제는 선반 위에 원래의 용도가 아닌 인테리어용이 되어버린 빈 도시락 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밍은 옆에서 그 도시락을 여는 동영상을 찍어주며 나를 조금 위로해 주었다. (인스타에 올린 동영상이 다 이 도시락을 열면 맛있는 음식들이 나오는 그런 영상들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시킨 다른 음식들은 모두 맛있었고 우린 남은 양념까지 모조리 밥에 비벼 해치웠다. 천군만마를 데려온 장군의 기분이 이런 걸까. 장하다 친구들.

작은 위기와 작은 기쁨들이 오고 가며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우린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식후땡을 하였다. (나는 또 유별나게 말차 아인슈페너를 홀짝였다) 그다음 우리의 발걸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밤의 상징, 술집으로 향했다. 한옥이 즐비한 이 거리에서 우린 아이러니하게도 ‘이자카야’에 들어갔다. 물론 많은 후보가 있었지만 안주가 너무 가볍거나, 소주가 없거나(가장 중요) 사람이 만석이거나 하여 이곳으로 들어왔다. 노래는 왜인지 우리 세대의 발라드가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작년부터 계획했던 여행이지만 이 여행의 목적은 서로가 다를 것이기도 했다. 나의 목적은 황리단길의 소비층과 내가 하고 있는 책방의 발전을 위해 그곳에 있는 책방들을 염탐(?)하는 일이었다. 그중 밍의 목적이 어쩌면 우리 중 가장 확실하고 가장 슬플 것이었다.


‘이별 여행’이라 함은 홀로 그리움을 곱씹으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고 마지막에는 끝내 헤어진 이를 보내줘야 하는 순서지만, 이 여행은 작년에 정한 여행이지 않은가. 그 사이 그녀는 이별을 맞게 되었고, 시기가 얼추 맞아 현재 우리 셋과 함께 이별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술과 여행 그리고 이별. 거기에 이곳의 슬픈 우리 세대의 발라드까지 첨가되어 우리는 점점 이 술집에 젖어버렸다. 7시에 들어온 술집이었지만 친구의 1차 눈물과 우리들의 각자의 고민들을 털어보고 다시 친구의 2차 눈물, 다른 친구의 눈물 (나도 조금 따라 울었다) 따라오는 위로 그리고 다시 3차 눈물. 마지막에는 흘러나오는 노래를 다 함께 합창하며 새벽 1시에 그곳을 나왔다. (영업 종료가 새벽 2시었기 때문에 하마터면 우린 그 사장님과 함께 퇴근을 할 뻔했다.) 그 뒤에도 우린 한옥들이 자리 잡은 차분한 거리를 아무 이유 없이 뛰며 청춘이 된 것 만 같은 시간을 보냈다.

 이상하게 이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고 즐거웠던 순간이었다. 술병이 늘어갈수록 우리 각자의 다른 고민들과 불안들이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슬픔과 안도감이 뒤섞인 신라의 밤이었다. 하늘의 초승달과 한옥 지붕을 배경 삼아 우린 이렇게라도 우리의 불안을 서로에게 알리고 희석한다. 그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을 거다. 담아둘수록 그때 함께 마신 술들이 그들을 위로 띄어 올리는 것 같았다.

다음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는 자리가 없어 우린 다 각자 앉아 떠났다. 하지만 어제처럼 더 이상 그들의 마음이 궁금하지 않았다. 이미 함께이기에. 그 밤 무언의 공유를 하며 무언가를 떨쳐냈기에.

느리고 불안한 우리의 삶에서 각자가 아닌 함께가 되었을 때 우린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빠르고 안전한 기차에 몸을 실은 다음 여행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2020/02/14

이전 03화 회전의 미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