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연 Feb 14. 2023

짐 쌀 게 없네


회사에 마지막으로 출근하는 날로부터 한 2,3일 전부터 슬슬 짐을 싸기 시작했다. 마지막날 최대한 발랄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해방감을 만끽하며 문밖을 박차고 나가려면, 미리 미리 조금씩 짐을 옮겨놓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도 1년 조금 넘게 머물렀던 공간이니 기억나진 않지만 어떤 날엔가 집에서 챙겨왔을 내 소지품들이 군데군데 박혀있을 것이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있는 사람들 사이로 빈말 조금 섞인 덕담을 주고 받고 마지막 안녕을 고하며 연신 폴더 인사를 하며 나왔는데, 핸드폰 충전기 하나 때문에 멋쩍게 다시 들어가 챙겨올 수는 없는 노릇. 최대한 샅샅이 뒤지고, 사무실에서의 평소 궤적을 따라 걸으며 헨젤과 그레텔처럼 빵부스러기 줍듯 하나씩 담으려..고 했는데 놀랍도록 그럴만한 짐이 없었다. 책상 위 거울, 핸드크림, 서랍 안에는 에어팟 충전을 까먹은 날에 쓰려고 갖다놓은 비상용 줄 이어폰. 개인 캐비넷 안을 열어보니 내가 오늘 출근하면서 입고 온 코트와 들고 온 가방, 신규공무원때 정신없이 인수인계 받으며 메모했던 수첩하나가 전부. 내 자리로 올 후임 분을 위해 덕지 덕지 붙은 포스트잇을 떼버리고 약간의 청소를 하니, 내가 가져가야하는 개인 물품만 남았고, 달랑 그것들뿐이었다. 만약 건물에서 불이 난다면 가방만 들고 누구보다 빠르게 1등으로 탈출할 수 있는 정도.




생각해보니 나는 여행을 가도 숙소에 불이 나면 캐리어만 챙겨서 바로 빠져나갈 수 있는 타입이다. 물론 이게 평소에도 사건 사고를 걱정돼서 대비하는 습관 때문은 결코 아니다. 혹시 모를 재해에 대한 불안감으로 모든 물건이 항상 내 두손 하에 있어야하는 그런 강박도 아니다. 이제 와서 왜그랬나, 생각하면 굳이 오래 머물고 싶지 않는, 일하는 공간에 돈을 투자하거나 내 개인 물품을 두고 다니고 싶지 않았다. 여행을 가서는 굳이 짐 쌀때 하나라도 빼먹어서 아까운 물건을 버리고 오는 불상사가 생길 빌미를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안 불편하냐, 묻는다면 사실 내 성격이라 불편함을 잘 못 느끼기도 했고 그냥 '굳이'.


그런 나와는 정반대로 누가봐도 저 사람 자리다, 싶을 정도로 사무실 내 본인 자리를 꾸미는 사람도 있다. 컴퓨터 모니터 아래에 잔망루피 피규어라든지, 쿼카 피규어라든지 각종 귀여운 소품들을 올려두고, 마우스 패드도 예쁘고 산뜻하게 자기가 좋아하는 색깔로 갈아끼우고, 본인의 사비를 들여가면서 알록달록한 키보드로 바꿔 사용하는 사람들. 미니 화분을 올려두기도 하고, 메모지도 그냥 공용 사무용품에서 꺼내 쓰는 나와 달리 예쁜 '떡메모지'를 사서 쓰는 사람들. 여행을 가서도 어떤 친구들은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짐을 풀러 본인이 손 뻗기 편한 곳에 물건들을 배치해서 숙소를 단숨에 본인 방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화장실에 가져온 세안도구부터 쭉 비치하고, 거울 앞엔 고데기와 그 날 그 날 할 악세서리까지 진열해둔다. 침대와 가장 가까운 콘센트에는 충전기를 딱 꽂아주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여행하면, 쓴 물건은 바로 바로 캐리어에 넣어버려서 퇴실할 땐 캐리어 지퍼만 잠그면 짐 정리가 끝나는 나 같은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는 역할을 한다.




이런 나의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는 별 생각이 없다가, 그래도 1년 넘게 머무른 공간에 이토록 내 짐이 없는 것을 보고 약간의 충격으로 문득 자각을 했달까. 그리고 동시에 어떤 공간에서도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어버리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좋고, 편한지를 알아서 어딜가도 본인의 채취가 남긴 공간으로 탈바꿈해내는 사람들. 만약 그 자리가 찰흙으로 만들어졌다면 분명 본인의 몸에 꼭 맞는 모양으로 잘 만들어낼 사람들. 단순히 누군가는 짐을 풀고 다른 누군가는 풀지 않는 그런 문제를 넘어서, 그런 사람들은 본인만의 반경을 만들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아 부러웠다. 모두에게 동일한 조건인 네모반듯한 '사무실 책상'이라는 제약에서도 어떻게든 본인이 좋아하는 것으로 꾸며내서 본인의 취향을 듬뿍 담아내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누가봐도 스쳐지나가는 사람의 책상,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기세의 긴장도가 느껴지는 내 책상과 비교했을 때, 편안하고 그 사람의 취향이 느껴지는 자리다. 어쩌면 너무 일이 싫으니 이렇게라도 회사에 정을 붙이려는 몸부림의 흔적일 수도 있겠다만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해줄 줄 알고, 자신을 닮은 공간을 꾸려낼 수 있는 사람들 같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간다면, 그건 결국 자기 삶에 대한 존중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이런걸 좋아하는구나', '이럴 때 내가 편하구나'를 수시로 알아채려 나에게 해주려는 존중. 남들에게 줄 선물을 고심하는 것처럼 본인에게도 좋은 것을, 좋은 곳을 만들어주고자 하고 만약 비용이 든다면 그또한 기꺼이 지불하려는 것이다. 그곳이 아무리 잠시 머물고 지나가는 곳일지라도.


짧은 시간 머무르다 떠난 곳이지만, 그 시간동안에라도 어떤식으로든 조금 더 나를 편안하고 기분좋게 해줄걸, 생각이 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