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상수동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가 사랑하는 상수동으로 고쳐 썼다.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할 상수동.
어렸을 때부터 이사를 많이 다녔던 편이라 딱히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참 곤란하다. 엄마 뱃속에서 나온 곳이 고향이라면 싱가포르, 머라이언이 물을 뿜어대는, 세계 각지의 금융사 건물들이 번쩍이는 야경을 이루는, 작지만 옹골찬 나라 싱가포르가 나의 고향이다. 모두가 뙤약볕에 검게 그을렸을 무렵, 모찌떡같이 하얗고 뽀얀 아가로 세상에 나왔다. 엄마가 나를 낳고 처음 집으로 데려온 날, 나를 싣고 온 바구니에 그대로 눕혀놓고 지쳐 쓰러져 잠들었는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단잠을 자다 일어났는데도 내가 미동도 없이 그대로 자고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작은 가슴팍에 귀를 갖다 대었다가 쌔근쌔근 작지만 힘찬 심장 박동에 안도했다고 한다. 울기보단 잘 웃고, 잘 먹고 잘 자는 순한 애기였다고 한다. (근데 가끔씩 왜 이렇게 변했냐고 나를 원망해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아침마다 한국 동요 비디오테이프를 티비로 틀어주면 그 앞에 서서 한 시간 동안 기저귀 찬 빵빵한 엉덩이를 씰룩거리고 가끔씩 아래위로 바운스라는 것도 타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는 지금 내 나이보다 조금 어렸을, 착한 말레이시아인 유모 손을 잡고 나가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엄마를 보러 가기도 하고, 집 바닥을 레고로 어지럽혔다가 그대로 바닥에 곯아떨어져 늘어지게 낮잠을 자기도 했다. 주말이면 온 가족이 다카시마야 백화점에 가서 외식도 하고, 언니와 나의 장난감도 사곤 했다. 자꾸만 자기 장난감을 넘보고 갖고 놀다가 늘 부서뜨리고 마는 나를 언니는 자주 미워하고 가끔 귀여워했다고 한다. 여름밖에 없는 나라에서 태어나 세 살까지는 겨울이라곤 느껴보지 못지 못했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사시사철 민소매 혹은 원피스를(나는 애기 때 성별이 모호하게 생겼어서 없는 머리를 애써 양갈래로 묶거나 원피스를 입혀야 비로소 여자 애기로 보였다고 한다) 입고 쫄랑졸랑 엄마 바지 자락을 잡고 다녔다. 물론, 이 기억들은 모두 지금 남아있는 당시 사진들과 가족들의 고증으로 철저히 복원된 기억이다. 세 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은 전무할뿐더러, 싱가포르를 떠나온 후로 가족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무려 26년 만에 다시 가봤으니 고향이라 하기에도 민망하다. 사실 공항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이산가족을 상봉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어쩌면 잃어버린 기억이 마법처럼 몇 가지 돌아오지 않을까, 기대도 했지만 당연하게도 아무리 고향 땅을 발로 밟아봐도 아무 감흥이 없었고 그저 낯설고 습한 새로운 여행지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곳은 고향이라는 향수 어린 단어보단 그냥 정말 물리적으로 '태어난 곳'으로 명명하는 편이 더 맞겠다.
고향이라는 단어를 사전에 찾아보면 세 가지 뜻이 나온다. 첫 번째는 태어나서 자란 곳, 나로 치면 싱가포르일 것이다. 두 번째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 어딘지 모르겠다. 세 번째는 마음속에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쭉 한 동네에서 살아와서 의심의 여지없이 고향이라는 단어에 떠오르는 곳이 있겠지만, 나는 이 세 번째 뜻을 진짜 나의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상수동이다.
내가 살았던 상수동은 서쪽으로는 합정동, 동쪽으로는 신수동과 경의선숲길, 북쪽엔 와우산과 그 너머 홍대와 신촌, 남쪽엔 여의도를 바라보며 밤섬을 끼고 있는 한강이 있는 곳이다. 거쳐온 곳 중 가장 오래 살았던 동네라, 그 일대의 모든 지리는 지도를 보지 않아도 다닐 수 있고, 어디에 있는 어디라고 말하면 척척 알아들을 수 있다. 사실 오래 살았던 까닭도 있지만, 우리 가족은 둘째가라면 서러운 산책 광인들이기도 해서 그렇다. 합정으로 산책하는 날엔 합정 먹자골목 쪽으로 걸어 새로 생기고 없어지는 식당과 카페를 보며 감탄과 개탄을 동시에 내뱉는다. 몇 주 전만 해도 다른 가게였는데, 왜 없어졌을까, 근데 여기도 맛있어 보인다! 하면서. 합정으로 가는 길은 또 다른 길은 좀 더 한적하고 유동인구가 덜 한 길이라서 더 선호한다. 서강 8경 건물 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 위 ‘곤밥집’을 지나, 새로 생긴 마포새빛문화숲을 옆에 끼고 은화수다방이 지키는 골목으로 가는 토정로길이다. 보통 주민들이 더 많이 다니는 길이고, 귀엽고 작은 개인 가게들이 군데군데, 그리고 아주 띄엄띄엄 있어 마치 걷다가 동전 하나씩 줍는 것 같은 재미가 있는 코스다. 게다가 저녁에 걸으면 마포새빛문화숲에서 보이는 여의도 야경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 자주 애용했던 길이다. 아주 좋아하는 또 다른 코스는 신수동과 경의선숲길로 가는 길이다. 늘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만 닭발을 좋아하지 않아 아쉽게도 가지 못했던 '닭발부부'가 있는 좁은 골목을 통해 광흥창역사거리로 나가, 서강동 주민센터를 끼고돌아 서강대역 쪽 경의선숲길로 직행한다. 숲길 초입에서 시작해 별생각 없이 걷다 보면 마찬가지로 산책 나온 댕댕이 친구들이 지나가고 내가 애정하는 '비로소 커피'가 나온다. 가끔은 들어가기도 하고, 더 걷고 싶은 날엔 그대로 쭉 직진해서 나무가 더 우거진 숲길을 지나 대흥역과 공덕역까지 가기도 한다. 이 길이 지루할 때쯤엔 신수중학교를 지나 신수동, 현석동까지 걷다가 돌아오기도 한다. 좀 더 세월의 때가 묻은 노포들이 많아 또 다른 정겨움이 있는 코스다. 봄과 가을엔 신촌을 지나 이대까지 걸어 예쁜 이화여대 캠퍼스를 걷고 오기도 하고, 생각이 복잡해 그냥 무작정 트인 곳으로 가고 싶을 땐 한강나들목을 지나 한강변을 따라 망원한강공원까지 걷기도 한다. 온 가족이 다 같이 걸을 때도 있었고, 엄마랑 점심을 한가득 먹고 소화시킬 목적으로 나가는 날도 있었다. 유현준 교수의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거리의 이벤트 밀도'라는 개념이 나온다. '백 미터를 걸을 때 들어갈 수 있는 입구의 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강북은 오밀조밀한 골목들이 많아 이 '거리의 이벤트 밀도'가 높고, 상대적으로 강남은 낮다. 상수동은 특히나 거리의 이벤트 밀도가 아주 높아 걸을 수 있는 길의 갈래가 무수하고, 그렇기 때문에 매일같이 산책을 나가도 매일같이 새로운 재밌는 동네다. 상수동과 그 주변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읽는 동안 내가 말한 곳들을 모두 머릿속 지도에 저절로 그려질 테고, 아닌 분들은 물음표 가득이겠지만, 어찌 됐든 정말 많이 산책한 곳이라 아직도 모든 풍경들이 눈에 선하다. 아마 몇 년이 지나도 그럴 것 같다. 그래서 간혹 책이나 인터뷰를 보다 보면 왠지 모르게 작가, 음악인 등의 예술인들에겐 한 번씩 통과의례처럼 거쳐가는 동네라 이곳의 이야기가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럴 땐 괜히 반갑고 내적 친밀감이 마구 든다. 나 마포대장인데, 당신도 여기 살았었구나. 오케이 기억해 두겠어.
상수동을 단순히 발이 기억하고 오래 살았던 곳이라 고향으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내가 가장 슬펐던 시기와 가장 행복했던 때가 모두 공존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방황했던 모든 날들을 조용히, 온전히 다 담아내준 곳이다. 거창하고 낭만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청춘'이라는 한 때를 함께 보낸 곳이랄까.
20살, 달랑 세 달간의 짧은 첫 대학생활 후 다시 공부해야겠다는, 내 인생 처음으로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나를 위한 결정을 내렸었다. 그리고 매일 같이 아침 7시에 나와 졸린 눈을 비비며 상수역에서 약수역까지, 다시 환승해서 대치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학원을 오고 갔다. 서로 비슷비슷한 곳을 목표로 품은 20,21살들과 하루에 12시간 넘게 씩 한 공간에서 부대끼며 공부했고, 밤 10시에 하원 그리고 다음 날 아침 7시에 다시 등원하는 삶을 반복했다. 기억의 미화 때문인진 몰라도, 그땐 참 신기하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기에 바빠 불안함을 느낄 틈조차 없었던 것 같다. 안되면 어떡하지, 원래 학교로 돌아가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비집고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그날의 공부에 집중하고 문제들과 사투를 벌였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내 인생 중 가장 열심히, 치열하게 살았던 때를 꼽자면 이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 노력에 마땅한 곳에 결국 합격했고, 본격적으로 진짜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공부할 힘을 반수 할 때 다 소진해 버린 건가 싶을 정도로 내 대학생활에서 공부는 딱히 없었고 대신 유흥이 가득했다. 수업은 분명 다 끝났는데 그 누구도 집 갈 생각은 없었다. 마지막 교시 수업이 있는 친구들까지 기다려 완전체가 되면 비로소 학교 앞 술집으로 가 온갖 안주들부터 깔아 두고 판을 시작했고, 또 어떤 날엔 좀 더 신경 쓴 차림으로 신촌으로 쏘기도 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온갖 과일소주와 중구난방 비율의 소맥으로 취기가 훅 오르기 시작하면 결국 모두의 눈이 맛 갈 때까지(?) 술자리는 끝나지 않았고 막차 시간을 놓칠세라 '참살이길'로 불리는 술집 골목에서부터 깔깔거리며, 또는 '통학러'의 비애를 다 같이 한탄하며 쏟아지듯이 역으로 뛰어들어갔다. 통학러들이 어쩌다 귀한 밤샘 허락을 받고 온 날의 술자리는 좀 더 경건하고 결연하게 시작하곤 했다. 밤새 술에 절여진 몸을 끌고 알코올 향을 코끝에 휘감은 채 상수역 3번 출구를 나와 휘적휘적 집으로 갔다. 모두가 하루를 시작하는, 햇빛이 이제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시간에 몸을 뉘이러 귀가하는 길.
또 수많은 낯선 남학생들과 술잔을 부딪히며 우리는 모두 술게임의 달인들이 되기도 했다. 미팅과 동아리, 각종 학교 행사에서 만나게 된 남자친구들을 술자리에 데려왔고, 누구 하나 헤어지면 그것 또한 우리 모두가 나눠야 할 슬픔이라는 무언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술집으로 모였다. 나 역시도 사랑 비슷한 감정에 빠지기도 했고, 연인관계 시작의 문턱에서 서로 조금이라도 더 확신을 얻으려 했던 간질거리는 연락들에 일희일비하기도 했다. 아파트 입구에 정승이 만약 있었다면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정승은 분명 쟤는 저번에 그 남자애가 아닌데? 얜 또 누구야? 했을 것이다. 수많은(까지는 아닙니다만) 남학생들이 극구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걸었던 밤길을 다음 날 아침 숙취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연어가 회귀하듯이 걸어 학교로 간 날들. 좋아하는 사람과 좀 더 있고 싶어 아파트 동 앞에서 서로 꼭 껴안고 한참을 서있던 날.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던 날 깜깜한 집 앞 놀이터 벤치에서 벌게진 눈으로 서로 말없이 바라만 봤던 날.
그렇게 내일이 없는 듯이 살았던 날들이 지나간 자리엔 내일이 있기 때문에 준비해야만 하는 날들이 찾아왔다. 술자리 빈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누군가는 휴학 한번 없이 졸업을 한 '대졸' 또는 '직장인'이 되고, 누군가는 아직도 수업 시간표에 묶여있는 대학생이, 또 다른 누군가는 이도 저도 아닌 '취준생'의 꼬리표를 달고 다시 방황하기 시작했다. 대학만 가면 끝일 줄 알았던 어리석고 낭만적인 생각은 정말이지 터무니없었고, 또다시 시작된 진로 고민에 한없이 가라앉았던 날들이었다. 수업과 시험은 더 이상 없고 하루의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되었는데 그 자유가 더 숨통을 조였다. 그럴 땐 일단 나가서 걷는 것이 최선이었다. 동네 산책인데도 하루에 2만보씩 걸었던 것 같다. 상수동 일대를 엄마랑, 엄마랑 아빠랑, 엄마랑 아빠랑 언니랑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들어간 밥집에서 밥 한 그릇에 하루치 위안을 얻기도 하고, 또 그러다가 이젠 정말 산책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우울해졌다. 불과 전년도까지만 해도 매일 다른 옷을 입고 화장하고 나갔던 날들이었건만, 이젠 매일 같은 옷을 꺼내 입고 나가 같이 걷는 엄마 겉옷 주머니에 손을 쿡 찔러 넣고 산책했다. 수많은 고민들을 함께한 산책길이라 지금까지도 다시 그곳을 걸을 때면 어렴풋이 그때의 답답함과 무력함이 피부에 닿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파란만장한 시기를 거친 상수동에서의 시간을 지금은 호시절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 회상한다. 거대한 바다에 떠밀려 다니는 연약한 나뭇가지처럼 슬픔과 기쁨에 휩쓸려 다니는 동안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담아내준 고마운 동네다. 가상의 자서전에서 상수동은 한가운데에, 그것도 아주 두꺼운 한 챕터로 들어갈 것이다. 쓰고 보니 고향은 공간적 의미 그 이상, 결국 그 시절을 의미하는 단어 같다. 마음속 깊이 간직한 그립고 정든 곳, 사전이 간결하면서도 아주 정확하게 정의 내려준 것 같다.
상수동 일대는 워낙 맛집과 예쁜 카페들이 많아 이사 오고 난 후에도 종종 먼 길을 감수하고 가고 있다. 상수역 3번 출구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출구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너무 익숙해 어떨 땐 아주 잠시동안 그때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우리 집 잘 지내겠지? 괜히 살던 아파트 입구 앞에서 목을 빼 두리번거린다. 발이 기억하는 울퉁불퉁한 길과 조금씩 변했지만 여전히 그때와 똑 닮은 풍경, 여전해서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고향을 간다는 건 이런 기분이겠구나, 고향이 몰라보게 달라져있으면 그것도 참 외롭고 쓸쓸하겠다. 나의 고향 상수동은 많이 변하지 않길 바란다. 몇 년이 지나 다시 가도 곳곳에 제주도 올레길 리본처럼 추억이 하나씩 묶여있는 지금 같았으면 좋겠다. 내가 지독하게 사랑하는 상수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