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주택이었다. 그곳의 마당은 잔디 한 줌 없이 흙으로만 이루어진 황량한 공간이었는데 나는 마당 한가운데에서서불안한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까만 새끼 흑돼지가 꾸륵꾸륵 거리며 세차게 달려와 내게 안기려 들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 다녔다. 눈물 나도록 무서웠다. 잠시 숨을 고르며 그놈을 노려보며 대치하고 있는데 녀석이 내 팔에 안기려는 듯 다시 달려들었다.
"악!!"
나는 꽥 소리를 지르며 양팔과 다리를 버둥거린다.
눈을 떴다.
새끼 흑돼지는 내 품에 없다. 녀석의 꾸륵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하다. 익숙한 내 침실의 하얀 천장만이 보일 뿐이었다.
'꿈이구나.'
놀란 마음을 휘 쓸어내리며 시계를 바라본다. 아침 6시 30분 그리고 월요일이었다.
7년째 만성 월요병에 시달리고 있는 직장인인 나는 일요일 밤이면 "내일이면 또 출근이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고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쉰다. 그리곤 이불속으로 몸을 욱여넣곤 한다.
일요일 밤마다 악몽을 꾸는 것에 이미 익숙한 편이었지만 이 날 꾼 꿈은 생각보다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찝찝했다. 1시간이라도 더 눈을 붙이려고 다시 이불속으로 몸을 웅크리려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더듬거리며 핸드폰을 찾기 시작했다.
'흑돼지!'
돼지꿈은 재물복이라는 이야기는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들어왔기에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핑크 돼지 아니고 흑돼지도 재물을 가져다주는 꿈이 맞을까?
포털 사이트 검색어에 '흑돼지꿈'을 검색해 본다. 반갑게도 흑돼지꿈 또한 운수가 대통하여 일이 잘 풀릴 징조, 재물을 얻어 물질적으로 풍족해진다는 등 길몽에 속한다는 문구들이 잔뜩 적혀있었다. 일부는 아들의 태몽을 뜻하기도 한다고.
결혼한 지 겨우 4개월 차로 아직까지 자녀 생각이 크게 없는 나에겐 태몽보다는 재물복이라는 꿈 풀이가 더 마음에 와 닿았다.
어쨌든 길몽에 속한다는 흑돼지꿈에 대한 해석들을 읽고 난 뒤 그 돼지 녀석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해 짜증이 잔뜩 났던 마음이 정돈되며 한결 평화로워졌다.
잠시 뒤 부스스한 까치집 머리를 장착하며 기상 한 남편에게 다가가 내가 용한 꿈을 꾸었으니 오늘 당장 복권을 사야겠다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꿈 내용은 당첨되면 알려주겠다며, 용한 꿈은 비밀로 유지하는 게 상도덕이라는 제법 진지한 '꿈빨론'도 내세웠다.
30여 년 평생 복권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어 단 한 장도 자발적으로 사본 적 없었던 나였지만 그날은 퇴근 후 복권 판매점으로 바로 달려갔다. 복권 판매점 문 앞엔 최근 이곳에서 구매한 누군가 '2등! 4,000만 원!'에 당첨되었었다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떡하니 붙여져 있었다.
꿈 빨을 최대한 날리지 않기 위해 수동 방식으로 진행했다. 어릴 적 시험 볼 때 쓰던 컴퓨터 사인펜을 꽉 부여잡고 정성껏 숫자를 마킹한 후 복권 판매점 사장님에게 마킹한 용지와 더불어 초록색의 윤이 나는 10,000원을 건넸다. 첫 복권과 동시에 첫 당첨이라는 경이로운 성취를 이룰 것만 같은 엄청난 설렘에 심장이 연신 두근거렸다.
다음날 내가 용한 꿈 꿨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빠가 복권 1장을 추가하여 대리 구매해 주었기에 총 3장의 복권 당첨 확인지들을 지갑 한가운데 폭 꼽아놓고 당첨일인 그 주 토요일 저녁을 기다렸다.
1등 당첨금이 얼만지 정확히 알지도 못한 채, 곧 무한대의 돈을 받기라도 할 것처럼 복권 당첨 이후의 삶을 상상했다.
갑자기 큰돈이 생기면 피곤한 일에 휘말릴 수 있으니 무조건 당첨사실을 비밀로 유지한다. 영화에서 처럼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잠수를 타는 행위는 너무 티 날 수 있으니 평소처럼 팅팅 부은 얼굴로 회사에 출근한다. 다만 언제라도 아쉬울 것 없이 박차고 나갈 수 있는 상황이니 못된 상사가 비열한 행동을 한다면 이마가 벌게지도록 딱밤을 날려준 뒤 쿨하게 회사 건물을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상상을 해본다. 세상에 너무 짜릿하다.
승차감과 디자인이 끝내주는 차를 일시불로 구매한다. 또한 부내 나는 명품들로 치장한 채 또각또각 하이힐 신은 다리를 꼬고 앉아 럭셔리 한강뷰를 가진 고급 빌라 혹은 아파트를 계약한다. 아 이건 좀 어려울 수 있겠다. 요즘은 복권 당첨돼도 강남이나 한남동에 위치한 리버뷰를 갖춘 고급 빌라나 아파트를 못 산다던데, 대출을 얼마 정도 더 받으면 가능하긴 하려나? 출렁이는 강물을 바라보면 우울해진다는 얘기도 있던데라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을 하며 시세를 알아본다. 그 이후에 포털사이트에 '복권 당첨 1등 금액'을 검색해본다.
최근의 당첨금들을 조회해본 후 아무래도 이 엄청난 희망사항들을 요즘의 복권 당첨금 만으로이루기엔 어렵겠구나 하는 아쉬운 마음을 가진 채 그 돈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만한 현실적인 대안들에 대해 고민해본다.
남편과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할 때마다 "복권에 당첨되면~"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끝없는 상상극장을 펼치곤 했다. 그 상상은 대부분 펜트 하우스 급 막장으로 종결 나곤 했고 우리는 탐욕에 가득 찬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설렘과 흥분으로 시작된 상상의 끝은 예상치 못한 불안감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 갑작스레 얻은 금전적 이익으로 인해 소소한 행복들의 소중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냥 100만 원 정도만 아니 10만 원 정도만 당첨되면 좋겠다.'라는 희한한 결론을 내리고서야 생각보다 내가 지금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매일 아침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회색빛 사무실에 들어가 똑같은 일을 하며, 비위 상하는 상황을 겪기도 하고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지만 달달한 돌체 라테 한잔에 미간이 풀어지는 일상.
불안함을 가질 정도의 풍족함은 아니지만 치킨이 먹고 싶을 때 고민 없이 바로 주문해 먹을 수 있고, 가끔 기분전환으로 가지고 싶었던 물건을 소비를 하기도 하며, 주말이면 가족이나 지인들과 맛집에 방문해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미각을 충족시키기도 하는 삶. 냉동 주먹밥을 주문하며 어떤 맛을 고를지 골똘히 고민하다가 입맛을 다시는 삶.
이렇게 돌아보니, 지루하며 부족하고 자주 우울하다고 생각했던 내 삶도 꽤 괜찮은 편인 듯했다.
토요일 저녁, 의외로 한껏 차분해진 마음을 가진 채 복권 당첨 결과를 조회했다.
첫 번째 장 낙첨.
두 번째 장 낙첨.
세 번째 장 낙첨.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잠시 들도 했지만, 결과는 세장 모두 낙첨이다.
세 장의 당첨 확인 종이를 북북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생각보다 마음이 편했다.
5,000원짜리 한 장도 안되었다는 사실에 그간 행한 나의 온갖 오두방정이 떠오르며 민망함이 밀려오긴 했지만 그다지 섭섭하진 않았다.
5일간 지속된 나의 복권 당첨 상상극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망상으로 가득한 며칠을 보낸 결과지금의 엉성하고 부족한 삶도 소소한 기쁨들에 집중하고 나니 꽤 멋진 삶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남들이 볼 땐 비약해 보일 수 있겠으나 나만의 소소한 만족들로 채워나가고 있기에 복권에 낙첨된 지금의 삶 또한 좋다.
조금의 욕심 아니 커다란 욕심을 더해 본다면 꿈속에서 본 새끼 흑돼지가 내 주위를 둘러싼 소소한 기쁨들을 잘 지켜주길 바란다. 훗날 내 아들로 나타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복권 당첨 상상극을 펼칠 때 브런치에 '복권 당첨 이후의 삶'에 대해 연재해보며 어떨까 하는 고민도 잠시 했었다. 신상이 털려 위험할 수 있으니 그 글만은 절대 쓰지 말아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말이다. 복권 낙첨으로 인하여 위험요소가 낮은 소소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