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화가 나 날 선 말들을 쏟아내던 어느 새벽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화가 누그러져 그저 '부부싸움을 한 새벽' 정도로 기억되던 날. 진정하고 내일 얘기하자고 하기엔 둘 다 분해 잠을 이루지 못했고 한 두 마디 씩 아픈 말들을 주고받았다.어느 순간 내가 괴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상처를 거부하기 위해 더 큰 상처를 주는. 폭풍과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쓸고 간 상처 가득한 마음을 겨우 다스리며 꼬박 밤을 지새운 뒤 맞이한 아침. '미안하다'는 말이 오고 갔지만 마음속이 여전히 불 같았다. 내 감정에 대한 '수치'였다.
평상시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어색한 상냥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편인 내게 감정 표현은 자주 어렵다. 당혹감에 표현하지 못한 분노들이 혼자 남은 상황 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다가 화가 잔뜩 나 부들대기도 한다. 주기적으로 내게 찾아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라는 것인데 작은 분노의 불꽃이 피기 시작하면 그동안 속상했던 모든 기억들이 떠오르며 분노가 치민다. 그럴 땐 혼자 방문을 잠근 채 엉엉 울기도 하고 시부렁대며 욕도 해본다. 그렇게 감정이 진정되다가 갑자기 멍해지는 순간. 꼭 이 순간 수치스러운 감정이 들면서 슬퍼진다. 왜 이 나이에도 감정을 분배하여 꾸리고 표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인가. 평상시 내가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던, 감정을 가득 담아 이성을 잃은 채 클락션을 미친 듯이 울려대는 그런 난폭 운전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분노라는 감정에서 뿐만이 아니다. 질투, 슬픔과 같은 감정 속에서도 그 감정들이 주기적으로 그리고 과하게 일렁이는 날이면 수치심이 든다. 나의 내면은 왜 깔끔하지 못한가. 겉으로는 이해심이 가득한 척 하지만 속에선 왜 이리도 부끄러운 생각들이 가득한 것인가. 감정이란 건 이성이 아닌지라 멈추자고, 제발 그만 좀 하자고 다독여봐도 마음속에서 존재감을 뽐내며 더욱 요동쳐댄다. 또 다른 감정으로 잊히는 듯하다가도 비슷한 상황에 당면하게 되면 언제 숨어있었냐는 듯 달갑지 않은 까꿍을 외치기도 하고.
분노, 슬픔, 질투가 과하게 터져 나온 뒤에 수치심으로 고뇌하는 내 모습이 싫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성이란 것을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난 뒤 떠올려보니 기특하다. 순간의 감정에 져버린 건 맞지만 내면 속에선 그 부정적 감정에 지지 않기 위해, 또 더 나은 모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반증이 되니까. 부정적 감정에 휩싸여있을 때 그 수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감정들은 잠잠해지긴 커녕 더욱더 활활 피워 오를 테니까.
내가 끔찍하게도 미워하던 이 수치심은 내면 속 나의 도덕 지킴이 덕분에 느끼는 감정임에 분명하다. 삶을 살다가 더 많은 부정적 감정들을 겪게 될 지라도. 이 수치심이라는 것이 내면 속을 당당히 지켜주기를 바라본다. 비록 옅은 괴로움이 항시 동반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