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모든 것이 낯설고 비현실적이었다. 숙소 창밖에 비를 한껏 품은 타슈켄트는 무거운 회색빛이었다. 여기는 미지의 세계. 두려움 같은 흥분으로 들뜬 정신과 호흡을 가라앉히고, 이 땅에 내 몸을 연결시키기 위해서 걷고 싶었다.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은 비현실성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두 발에 체중을 싣고 이 단단하고 낯선 땅바닥을 꾹꾹 밟는다.
시야가 탁 트이는 넓고 곧은 길이 쭉쭉 뻗어 있었다. 오래되거나 현대적인 건물 사이로, 크고 작은 건물 사이로 공간의 여백이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이 큼직하게 쓰인 러시아어 글자들, 다소 우중중한 도시 분위기. 나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소련연방에 와 있는 것 같은 묘한 느낌 속에 빠졌다.
땅을 밟고, 눈에 정경을 담고, 도시의 냄새를 맡으면서 계속 걸었다. 온통 낯선 것들에 휩싸이자 몸 속 세포가 꿈틀대는 기분이었다. 동시대 이렇게 다른 공간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삶을 산다는 것이 세삼 감탄할 만한 일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이었다.
지금 내 눈 앞에는 이 세계의 다채로움이 한껏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열렬히 손짓하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마치 내가 난생 처음 바라보듯, 여러 차례씩 보곤 하는 그 세상을 말이다.” - 세네카
우즈베키스탄 국립역사박물관에 왔다. 두 개의 층으로 전시가 되어 있었는데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았다. 내용이 그리 실하진 않지만, 광활한 중앙아시아 대륙에서 유목하고 사냥하던 이곳 사람들의 과거 생활상부터 독립 후 현재모습까지를 대략적으로 훑어 볼 수 있었다. 이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나타나고 사그라졌다. 시절마다 그렇게도 복잡다단했던 인간역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제 과거로 박제되어 그저 덤덤하고 무심히 있을 뿐이었다.
나는 종종 박물관에서 인간의 치열한 의지와 불굴의 정신에 감동할 때가 있다. 동시에 젖어드는 무상함에 좀 헛헛해하기도 한다. 그럼 나는 속으로 자문하곤 한다. 지금 인생에서 중요한 게 무엇이냐고.
박물관을 나와 걸었다. 비는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인구밀도가 높지 않아 그런 건지, 비가 와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일련의 이유들이 조합되서 그런 건지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다.
상점들도 그저 한산해보였다. 이렇게나 사람이 없나 싶어 상점 안을 빼꼼 들여다보면 또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있었다. 사람들은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고, 머리도 하고, 화장품도 사고팔고 하는 것이었다.
어느새 알리셔 나보이 극장(Alisher Nava'i Theater)까지 왔다. 마치 동유럽 성 같은 느낌이 드는 웅장하고 기품 있는 건축물이었다. 들어가서 공연 프로그램이라도 훑어보고 싶었는데 입구가 잠겨있었다. 외부에 매표소(Kacca)라고 쓰여 있는 곳도 굳게 닫혀있었다.
"앗살라무 알레이꿈! 공연 보려고요? 뭐 오늘 꺼 드릴까, 내일 꺼 드려?"
닫혀있던 매표소의 작은 창문이 빼꼼히 열렸다. 오늘은 저녁때 발레공연이 있고, 내일은 우즈베키스탄 오페라가 있단다. 혹시나 현대무용 공연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프로그램에는 온통 발레나 오페라 등의 전통공연 일색이어서 마음을 접었다. 사회 문화적 이유에선지 창조성과 자유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공연예술이 아직은 이 땅에 그리 활성화되어있지 않다는 느낌을 개인적으로 받았다.
나는 오페라 티켓을 구매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만원이 채 안 되는 금액으로 우즈벡 오페라를 관람할 수 있다니 혜자 아닌가! 직원 분은 내게 특별히 좋은 좌석을 주었다면서 방긋 웃어주셨다.
“라흐맛! (감사합니다)”
초르수(Chorsu) 바자르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요금은 우즈베키스탄 돈으로 1400숨, 그러니까 우리나라 돈으로 약 200원이 안 되는 착한 가격이었다.
간결하고 묵직한 느낌의 지하철 개찰구 앞, 낮은 조도의 불빛아래 묵직한 카키색 코트의 긴 제복을 차려입고 가방검사를 하는 역무원들의 생경한 모습이 곧바로 눈에 포착되었다. 어두컴컴한 조명, 칼 각 잡힌 모자와 제복, 가방 검색대... 문득 붉은 혁명 동지들이 앉아있는 취조실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지하철 곳곳마다 제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역무원들은 역사 내 치안유지에 열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척 생경하게 느꼈지만, 이내 그들의 존재가 안정감을 주었다. 여기에서는 무슨 짓을 못할 것 같다. 아주 여기저기 살뜰 맞게들 계시니.
초르수(Chorsu) 지하철 역과 연결된 초르수 시장은 그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났다. 돔 모양의 내부 메인시장으로 들어가는 길 내내 온갖 노점상들이 즐비해있었다. 과일가게 매대에는 알록달록 빛깔의 싱싱한 과일들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은 분주했다. 비 때문에 날은 어두웠지만, 전통재래시장 특유의 왕성한 활기가 곳곳을 깨우고 있었다. 여기저기 흥정하는 소리가 귓전에 경쾌하게 들렸다. 와... 오래전 실크로드 오아시스 도시의 시장 풍경이 내 눈앞에 살아 움직이듯 생생하게 펼쳐지는 것 같았다.
동그란 돔 내부의 메인시장으로 들어갔다. 시장의 규모와 다양성에 다시금 놀랐다. 턱턱 거칠게 썰린 생고기와 정체모를 부위들, 색색의 다채로운 반찬들과 온갖 식자재들이 1층을 빼곡히 메우고 있었다. 2층은 견과류와 말린 과일류가 주를 이루었다. 여태껏 보도 못한 종류의 견과류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구경하느라 정신없는 나를 여기저기 불러대는 상인 분들이 꽤 많었다. 그렇게도 그저 먹어보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초르수 시장에서 나와 근처에 있는 하즈라티 이맘 광장(Ensemble Hazrati Imam)으로 향했다. 길을 따라 조용하고 정겨운 동네풍경이 꽤나 이어졌다. 얼마쯤 걸었을까. 드디어 하즈라티 이맘 광장이 눈앞에 그림처럼 나타났다. 아무도 없는 광막한 광장, 이 세계 어디선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나온 것 같은 모스크들. 내 머릿속 그 어떤 것과도 연결고리가 잡히질 않았다. 나는 이런 건축물은 상상조차 못했고, 여태껏 본 적도 없었다. 압도적으로 거대한 이 건축물은 특유의 아득하고 신비스러운 휘광에 잠잠히 싸여있었다.
나는 그 앞에 심장을 붙들린 듯 완전히 압도되었다.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소리가 첨탑에서 들려왔다.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몇 시인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누르던 묵직한 고민도 떠오르지 않았고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인생의 다른 어떤 것도 전혀 문제될 게 없었으며 중요하지도 않았다. 내 눈 앞에 펼쳐진 광경만이 오직 진실이고 전부였다.
눈물이 뜨겁게 올라왔다. 이걸로 충분했다.
메드레쎄(신학교) 건물 안쪽에 여행자로 보이는 한 서양여자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으슬으슬 내리는 비 때문에 사람들이 없다보니 기념품 가게의 상인들은 그저 모여서 이따금씩 이야기나 주고받을 뿐이었다.
신학교를 나와 예배당으로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내부를 보고 싶은데 도통 보이질 않아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마침 절을 하고 일어서는 무슬림들과 눈이 딱 마주쳤다. 창가에 붙어가지고 두리번대는 한 외국 여자의 출몰에 많이 놀랐을 게다. 바깥 광장이 그토록 조용했던 이유가 비 때문만이 아니었구나. 이들의 예배시간이었던 거다. 나는 침묵 같은 광장을 혼자 거닐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고독하고 달콤한 것이었다.
또 다른 예배당 건물 앞에서 무슬림들이 보였다. 예배가 1부, 2부 이런 식으로 나뉘어 진행되는가 보다. 그들이 예배당 앞에서 오고 나가며 교차하고 있었다. 이들 각각 속신앙의 진정성과 깊이에 대해서는 내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자신들의 삶을 돌아보려고, 삶의 축을 다잡고 세우려고 모이는 이 사람들의 행동과 헌신에 대해서는 울림을 느꼈다. 이슬람이라는 이 종교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결집시키고, 의식적이거나 혹은 무의식적인 레벨에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이슬람은 종교 그 이상이었다. 오래도록 추구된 자연스럽고도 자발적인 삶의 방식과 문화 같은 것으로 내게 느껴졌다.
모스크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그러고 싶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내 정신의 터전은 어디에 있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