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에서는 오페라 한 편을!

by 움직이기

여기는 알리셔 나보이 극장(Alisher Nava'i Theater), 우즈벡 오페라를 보게 되다니 말이다. 극장 입구 앞에서 두 세 명의 제복 입은 남자들이 가방검사를 하고 있었다. 검사원들이 이렇게 잘 생겨도 되나. 어째 이 나라에는 이국적이고 매력적인 남자들이 왜 이리 많은 게냐. 페르시아 왕자같이 진하게 잘생긴 남자들, 눈 덮인 시베리아벌판 자작나무 숲 그 어디쯤 살 것 같은 뽀얀 러시아계 남자들, 그야말로 동서양이 반반으로 섞여 오묘하고 신비스럽게 생긴 남자들까지 각기 고유한 그들만의 매력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내 좌석은 무대가 아주 잘 보이는 곳이었다. 극장은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로 곧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내 오른편에는 타이트한 스키니진에 육감적인 몸매를 드러낸 핫한 우즈벡 아가씨가 앉았고, 왼편에는 러시아 마트료쉬카 인형같이 생긴 어여쁜 우즈벡 소녀가 앉아 있었다. 앞줄에는 약간 수다스러운 러시아 아주머니 몇 분이서 벌써들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될 예정 이었다!



공연을 알리는 안내멘트가 우즈벡어로 흘러나왔다. 순간 머릿속에서 나는 예전에 공연했던 극장의 무대 바로 뒤편에 서있었다. 공연 전, 무대 뒤에서 대기할 때 항상 들었던 추억의 안내멘트. “이제 공연이 시작됩니다.” 라는 마지막 멘트와 함께 온 극장의 조명은 꺼진다. 웅성대던 관객들의 목소리도 급격히 잦아든다. 그리고 곧 무대가 열리는 소리, 음악과 조명기가 웅 하고 다시 돌아가는 진동 같은 소리들이 들린다.

그럼 나는 무대 막 뒤에서 심호흡을 하거나 몸을 탈탈 털었다. 전혀 떨지 않는 것 같은 동료들도 있었는데 나는 긴장을 하곤 했다. 체력적으로 심하게 힘든 공연에 앞서서는 심적으로 매우 착잡해져서 이거 못 버틸 것 같다느니 오늘 어떡하냐 라는 생각부터, 집에 가고 싶다 등등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좀 우습지만 사실이었다. 막상 무대에 딱 들어서면 긴장이고 뭐고 체력적으로 힘들고 뭐고 따질 새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몸과 정신을 온전히 다 쏟아 붓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첫 시작은 그닥 유쾌하지만은 않은 무대 뒤 긴장감이었다.

공연시작 안내멘트 하나로 금세 내 생각은 저만치 갔다 온다.


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배우들이 바로 앞에 등장했는데도, 사람들은 핸드폰 끌 생각도 안 하고 대놓고 사진을 찍고 영상을 찍었다. 배우들이 연기하고 노래하는데도 아랑곳 않고 서로들 대화도 하고 자리들을 부지런히 옮겼다. 참으로 번잡스러운 객석의 진풍경. 이쯤 되니까 하라는 대로 곰살맞게 핸드폰도 끄고 정자세로 앉아서 공연에 집중하는 내가 너무 고지식한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이 들었다.

왼편에 앉아있던 러시아 인형소녀는 과자를 꺼내 먹었다. 뒤에서는 아기가 극장이 떠나가라 실컷 울어대었다. 다. 뭐지 이 심하게 자유방임적인 분위기는. 계속 자문했다. 내가 이상한건가.


참 그러고 보면 우리 한국 사람들은 규칙 준수 면에서 매우 순종적이며 협조적이다. 효율성과 획일성, 근면성실함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뤄낸 역사가 있어서인지 몰라도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한다. 아무래도 여기 우즈벡 사람들에겐 관람규칙정도야 뭐 가벼운 권장사항 수준인 것 같다. 이렇게나 생경한 극장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의 기막힌 민족성을 떠올린다. 내가 고분고분 곱게만 자라온 게구먼. 아주 거침없는 자유방임적의 분위기 속에서 꽤나 어리둥절한 나는야 한국사람.


물론 공연의 세세한 내용은 이해할 수 없었다. 심히 피상적인 수준의 공연감상이었지만, 화려하고 다채로운 우즈벡 전통의상,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어서 매우 만족스럽고 즐거웠다. 조명이나 무대연출, 기술들도 손색이 없었다. 다만 노후한 극장의 문제인지, 부산스러운 객석 때문인지 배우들의 목소리나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원치 않게 들려서 좀 아쉬웠을 뿐이었다. 두 시간여의 공연이 끝났고 커튼콜에 모든 배우들이 등장했다.

경제적으로 녹록하지만은 않은 이 나라에서 저렇게 자신의 열정을 좇아가는 사람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노래하고 연기하는 이 예술가들을 바라보았다. 존경과 지지를 담은 눈빛으로 말이다. 나는 그들이 오늘 내게 무대에서 보여주었던 성실함과 정성에 감동해서 열정적으로 박수를 쳤다. 온 극장에 파도처럼 쏟아지는 박수세례 속에서 관객들은 무대로 올라가 배우들에게 꽃을 증정하거나, 연신 앙코르를 열정적으로 외쳐대었다.



공연 때문에 한껏 고양된 정신으로 극장을 나섰다. 저만치 함께 오페라를 관람했던 청년들의 무리가 보였다. 청년들은 아까 공연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배우가 된 것처럼 말이다. 오페라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들인 것 같았다. 아마 저 청년들의 선생님들이나 선배가 공연에 출연했겠지. 무용 공연장에도 출연자의 학교 선후배나 전공 학생들이 주로 온다. 나도 학생 때 같이 무용하는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 공연장에 자주 갔었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길을 따라 저렇게 걸어 나오면서 우리들은 공연 이야기도 하고 별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도 참 많이 나누곤 했었곤 했었다.

그들의 목소리와 몸짓에 열망이 느껴졌고 나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면서 짐짓 흐뭇해했다. 가슴속에 자리 잡은 뜨거운 것. 그거 정말 귀하고 소중한 거라서.



가볍고 낭만적인 발걸음.

아름다운 타슈켄트의 밤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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