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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쭌쭌이맘 Jan 12. 2024

9화. 내 영혼의 쉼터라고 할 수 있다

늦은 가을 사그락 사그락 낙엽을 밟으며 걸을 때 더 행복하다

그곳은 나만의 비밀 장소로 하고 싶은 곳이다. 너무 좋아서 감히 누구에게도 추천해주고 싶지 않은, 나 혼자만 알고 싶은 그런 곳이다.


남편과 연애 시절, 늦은 가을 처음 그곳을 방문했을 땐 이른 시간이라선지 한가하고 여유롭고 조용하고 아늑했다.

잘 가꾸어진 산책로에는 늦은 가을 떨어진 낙엽들이 수북이 쌓여있어 내딛는 발걸음마다 사그락 사그락 마른 낙엽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더 낙엽을 밟기도 했다.

산책로를 따라서는 낙엽이 떨어져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키 큰 나무들이 줄지어 있었다.

람쥐가 놓치고 간 도토리도 하나씩 보이고, 여름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흘렀을 개울가도 있었다.

나는 지금 이 장면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남편은 몇 년 전 처음 이곳을 왔을 땐 새벽이라서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있어서 지금보다 더 신비롭고 고즈넉했다면서 많이 아쉬워했었다.

남편은 아쉬워했지만, 나는 지금 남편 손을 잡고 이 아름다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어서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결혼 후 첫째와 둘째가 3~4살쯤 되었을 때 우린 유모차를 끌고 오랜만에 그곳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왔지만, 여전히 여유롭고 아늑하니 좋았다.

남편과 둘이 왔던 곳에 이제 둘이 아닌 넷이 되어 오니 뭐랄까.. 묘한 기분이다. 남편과 나는 서로의 손 대신 두 아이의 유모차를 밀면서 아이들을 돌보느라 이전처럼 여유 있게 산책은 할 수 없었지만 예쁜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낙엽은 수북이 쌓여 사그락 사그락 소리는 처음처럼 지금도 좋다.

우리 가족도, 알록달록 물든 나무도, 떨어진 낙엽마저도 이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마 청설모 한 마리쯤은 본 것 같다.

잠시 멈춰 두 아이들 예쁜 사진도 찍어주고, 가을날 풍경도 사진에 담았다.

쌀쌀한 날씨에 오래 머물지는 못하고 곧 돌아와야 했지만 나는 좋은 기운을 한가득 안고 돌아왔던 것 같다.

[처음 방문했을 때 유모차와 자전거에 나란히 앉은 두 아이 그리고 몇 년 뒤 세 아이의 손을 잡고 걷는 남편]

매년 늦은 가을이 되면 우리는 그곳에 간다. 남편은 이제 그만 가고 싶다고 하지만 나는 괜히 그곳에 가고 싶고, 꼭 가야만 한다는 기분이 든다.

주변에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 되어 가고 있지만 그 숲 속에 발을 담그게 되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아늑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순간이 나는 너무 좋다.

바쁜 일상을 보내다가 그 숲 속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오래전으로 되돌아가는 느낌이랄까. 아마도 이 숲이 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는 이야기에 너무 몰입이 된 게 아닌가 싶지만 작은 숲이 내게 주는 의미는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래, 감히 내 영혼의 쉼터라고 해도 되겠다.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으면 작년에는 저 누각에 올라 막내가 노래를 불렀었지, 걷다가 힘들다고 저 돌에 누워 쉬어가기도 했지, 저기 잔디밭에서 김밥을 먹고 아이들이 비눗방울 놀이도 하고 달리기 시합도 했었지.. 하면서 매년 달라지는 아이들 모습도 찾아본다.

처음엔 매달리기도 힘들어하던 철봉에 다음에 왔을 땐 제법 오래 매달려 있게 되고, 춘향이가 탔을 법한 큰 그네도 처음엔 무서워하더니 이젠 "아빠 더 세게~ 더 세게"를 외치며 재밌게 탈 수 있게 되었다.


가능하면 매년 늦은 가을엔 꼭 그곳에 가고 싶다. 사계절이 모두 예쁠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낙엽이 지는 늦은 가을이 참 좋다. 아마도 시작이 그맘때라선지, 그때의 기억이 좋아서인 자꾸 가을에 찾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다르게 커가는 아이들과 매년 같은 장소에서 다른 추억들을 쌓아갈 수 있다는건 정말 소중하고 신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커가는 만큼 매년 동행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만.

그러고 보면 둘이 시작해서 다섯이 되었다가 결국엔 다시 우리 둘만 그 산책로를 걷는 날도 오겠지.

그때는 또 어떤 기분일까.

어느 해까지 다섯이 되어 걷다가 어느 날 우리 부부 둘만 다시 걸을 땐 처음 왔던 날도 기억나고, 그동안 지난 시간만큼 여기저기 우리 가족들의 흔적도 많이 찾을 수 있겠지.

[큰 아이가 누워 쉬던 커다란 바위, 아이들이 타던 커다란 그네 그리고 비눗방울 놀이하던 그 잔디밭]
[큰아이가 잠시 쉬며 머물던 그 자리, 그리고 아이가 매달렸던 그 철봉. 곳곳에 아이들의 흔적이 참 많이도 남아있다]


어느 한 곳에 온전히 내 마음을 편히 둘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행복한 일인지. 일상에 지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아마도 그건 나 혼자가 아닌 남편과 아이들과의 추억이 겹겹이 쌓여있는 곳이라서 그러는 것이겠지.

그곳은 누구나 오는 열린  곳이지만, 그래도 영원히 내 마음속 비밀의 장소이다.


그 곳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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