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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Dec 24. 2020

사람이 오가는 곳, 제주공항


  “혼저옵서예 제주공항 이우다. 놀멍 놀멍 놀당 갑서예.” 이게 무슨 말이지, 순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창 밖을 보니 다양한 옷을 입은 비행기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떠날 차비를 하며 자리하고 있다. 휴양지의 신선한 공기가 기내로 들어오기라고 한 냥 숨을 깊이 마셔본다. 아직 출입문이 열리지도 않았는데 기내의 사람들은 벌써 제주의 바다를 향해 달리고 있다. 도민증을 가진 사람으로서 원주민 티를 내기 위해 최대한 느긋한 척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아직 여행객 모드가 남아서인지 쉽지 않다. 백 팩 하나만 메고 양손에 캐리어를 든 관광객들 사이를 여유 있게 빠져나온다.


  공항 입구에 서면 워싱턴 야자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40분 사이에 머나먼 외국으로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든 게 이국적으로 보인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공기도 더 신선한 것 같고 곧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기분마저 좋아진다.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출국을 위한 복잡한 절차도, 탑승을 위해 기다리는 시간도 불편함보다는 그 자체가 좋다. 공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육지의 인연들은 잊히고 새로운 세상에 온 것처럼 머리가 맑아진다.


  지금껏 비행기를 탄 횟수가 열 손가락도 채우지 못하다가 근무지 따라 제주에 오면서 공항 다니기를 옆집처럼 오가고 있다. 관사가 제주공항 근처여서 퇴근길엔 항상 비행기의 이착륙을 보게 된다. 매일 수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어디론 가 떠나고 어디선가 온다. 제주를 오가는 사람들의 사연이 궁금하다. 나도 제주에 간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했다. 무슨 일이 있어서 쫓겨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였다. 원해서 신청을 했다고 하면 알았다고는 하면서도 딱히 신뢰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무슨 이유로 왔건 제주에 왔다는 것이 중요하니까.


  제주에 오고 몇 차례 육지에 다녀왔다. 처음 비행기 예매를 할 때는 서툴러서 시간도 오래 걸리고 잘못한 것은 아닌지 신경도 많이 쓰였다. 몇 번 예약하고 취소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비행기표 예매도 버스표 예매와 별 반 다르지 않다. 비행기 타는 것도 긴장이 되었으나 한 두 번 타다 보니 버스 타는 것과 차이가 없다.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버스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간에 도착하여 20분 전까지 탑승을 하면 되고, 그나마 늦으면 방송도 해주고 이륙 전까지 오기만 하면 태워준다. 출국장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소지품 점검을 받아야 하고, 면세점에서 담배를 살 수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타는 과정도 비슷하다. 요금도 버스 요금과 비슷한데, 운이 좋으면 더 싸게 타기도 한다. 그래도 집을 오가는데 비행기를 탄다는 게 뭔가 있어 보이고 멋져 보인다.


  30년 동안 열다섯 번의 전출입을 경험했으니 2년에 한 번 꼴은 근무지가 바뀌었다. 대부분 승진이나 장기 근무로 인한 전보였으니 만족까지는 아니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곤 했다. 이쯤 되면 타지로 가는 것이 어지간히 적응되어 거부감이나 두려움이 없어질 만도 한데 새로운 곳으로 간다는 것은 여전히 부담스럽고 힘들다. 이번 제주로의 전보는 예전의 전출입과는 다르다. 제주를 오고 가기 위해서는 비행기나 여객선을 이용해야만 한다. 육지에 있을 때는 마음만 먹으면 아무 때나 집에 올 수 있었다. 제주는 날씨나 기후 영향으로 오고 가는데 제약을 받을 때가 많다.


  청주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객지 생활을 하고 있던 과장님과 저녁을 먹으며 소주를 한 잔 하는데 집에 너무 가고 싶은 것이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과장님이 웃으면서 젊으니 좋다고 하며 다녀오라고 하였다. 15년 전의 일이니 젊기는 했나 보다. 그 길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다. 아내를 놀래 줄 욕심에 아파트에 도착하여 편의점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서비스를 받아 택시비를 지불하고 호기롭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 갔다. 깜짝 반겨할 줄 알았던 아내는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몹시 불안해했다. 너무 보고 싶어서 왔다고 하니 자기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며 그제야 안심을 하며 잘 왔다고 했다.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늦은 시간에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택시를 타고 왔다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15만 원을 주고 왔다는 말에 아내는 다음날 날이 밝으면 오지 왜 그랬냐며 한참 동안 잔소리를 했다. 다음날 같이 여행을 하며 기러기의 설움을 잠시나마 달래고 다시 청주로 왔던 기억은 힘든 객지 생활 속에서 꿀맛 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며칠 전 아내가 육지로 나가려고 하는데 일기 예보가 심상치 않았다. 창문을 열어보니 제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육지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눈 많은 서해안은 폭설 뉴스가 특보로 떴다. 출근길에 공항으로 출발하는데 아내의 핸드폰에 항공편 취소를 알리는 문자가 떴다. 제주에선 보고 싶다고 무작정 달려갈 수 있는 낭만은 없지만, 깜짝 선물 같은 아내와의 또 하루가 있어 좋다.   


  진천에 있는 연수원에 갔다 왔다. 거리상으로만 보면 전날 육지로 나가 숙박을 해야 하지만 당일 아침에 식사도 하고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었다. 제주에선 서울에서 부산까지 전국 어디든 1시간이면 간다. 일본이나 동남아도 제주에서 출발하는 게 더 편리하고 가깝다. 제주공항의 매력에 빠지지 시작했다.


  떠나는 사람과 오는 사람이 머무는 곳, 출발과 도착이 공존하는 곳, 세상과 사람들을 이어주는 곳, 제주공항이 설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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