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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재영 Jan 24. 2021

그녀는 119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난장판이던 집이 한나절 사이에 완벽 해졌다. 옷이 종류 별로 나뉘어 옷장 각자의 칸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릇은 크기와 용도 별로 나뉘어 선반 위에, 쌀과 잡곡 같은 곡물류와 생필품은 싱크대 아래에, 소금과 기름 같은 식용 재료들은 받침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화장실 수납장엔 잘 마른 수건과 세면용품들이 들어 있고, 세면대와 바닥은 반짝반짝 윤이 난다. 


부득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귀찮기도 하고 이사할 일이 심란하여 그냥 버틸 까도 생각했으나 보일러 수리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아내가 이사를 도와주러 온다고 했다. 괜찮다고는 하였으나 혼자 하는 이사는 처음이라 내심 걱정이 되었는데 고마웠다. 이사 며칠 전부터 한파를 동반한 폭설로 전국이 꽁꽁 얼었다. 하늘길과 바닷길이 모두 막혔다. 아내는 공항도 바꾸고 날짜도 변경하며 오려고 하였으나 결국 오지 못하고 이사를 하게 되었다. 연차를 내고 이삿짐센터의 도움으로 짐은 옮겼으나 정리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말에 정리할 요량으로 짐을 쌓아 둔 채로 하룻밤을 지내고 다음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 집에 돌아와 보니 체크인하고 막 들어선 오성 급 호텔방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가 온 것이다. 


군산에서 비행기가 뜨지 않자 광주까지 가서 눈보라를 뚫고 제주에 온 것이다. 미처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앞치마만 두른 채 양손에 고무장갑을 끼고 바닥을 닦고 있었다. 아내가 준비한 청국장으로 저녁식사를 같이 했다. “당신에게 맡겨두려니 맘이 놓여야지. 내가 와 보기를 잘했지.” 환히 웃는 얼굴에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결혼을 하고 힘든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아내의 도움이 있었다. 특별 승진을 신청할 때의 일이다. 당시 승진 연한도 적고 준비도 덜 되어서 신청을 할지에 대해 고민을 털어놓았다. 아내는 이런저런 상황을 물어보더니 올해 해보는 게 좋겠다고 했다.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의 신중한 성격을 알고 있던 터라 반신반의하며 신청을 했다. 준비하는 6개월 동안 아내는 지극정성으로 도와주었다. 매일 몸에 좋다는 약재와 음식을 준비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공부를 하고 늦게 돌아오는 남편을 마중 나와 주었다. 시험을 보는 과천까지 따라와 세세한 부분까지 곁에서 챙겨 주었다. 그녀의 헌신으로 승진을 하였다.


가족 중에 누구라도 아픈 사람이 생기면 그녀는 의사가 된다. 감기 몸살 증상이 생기면 민간요법을 동원하여 약재를 달이고 날을 새며 수건에 물을 묻혀 체온이 떨어질 때까지 머리맡을 지킨다. 가끔 체하기라도 하면 손가락을 따고 등을 두드리고 매실에 한방 소화제까지 동원하며  체기가 내려갈 때까지 미음으로 끼니를 챙겨준다. 둘째가 중이염을 앓던 때의 일이다. 병원에선 염증이 심해서 치료가 어렵다며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아내는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결심을 한 듯 항생제를 귀에 들어붓고 열이 펄펄 나는 아이 머리맡에서 이틀 밤을 꼬박 새웠다. 그런 모습을 보며 아내는 철인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증상이 호전되어 의사마저 놀라워했다. 그 후부턴 아내의 민간 치료법에 의심이나 이의를 달지 않는다. 아내의 손길이 닿으면 어떤 병도 낫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집이 시내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 보니 교통이 불편한 편이다. 대학생인 아이들이 친구들과 놀다 보면 시내버스가 끊기는 일이 종종 있다. 아이들은 아내에게 연락을 해서 이런저런 애교를 부린다. 아내는 못 이기는 척하며 아이들을 데려오곤 한다. 나는 한술 더 떠서 모임에서 술이라도 먹게 되면 대리 요청을 한다. 술에 취해 대리운전을 시키면 위험할 수 있으니 꼭 자기를 부르라는 아내의 간곡한 청(?)을 들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듣는 아내의 지칠 줄 모르는 잔소리는 대리해 주는 아내의 수고로움에 비할 바가 아니라 자장가라 생각하며 들어주곤 한다. 가족의 SOS에 그녀는 대기 중이던 흑기사처럼 신속하게 출동을 하여 우리들을 구해준다. 


주말이면 우리 집은 힐링 센터가 된다.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 남자 셋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아내는 한 명씩 다리에 누이고 귀 청소를 해 준다. 우리 집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귀 청소도 할 줄 모른다. 아마 아내의 손길을 받고 싶어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귀 청소가 끝나면 마사지를 해준다. 머리에 밴드를 하고 세안을 하고 나면 얼굴에 마사지 팩을 하나씩 붙여 준다. 운이 좋은 날엔 수제 팩의 호사를 받기도 한다. 팩이 끝나고 나면  촉촉해진 얼굴에 수분크림과 에센스까지 골고루 발라 준다. 그녀의 사랑으로 일주일의 피로가 치유되는 시간이다. 


집에 온 아내는 혼자 사는 나를 챙기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낸다. 낮엔 집안 청소도 하고 오일장에서 재료를 사서 반찬도 준비해 두고, 퇴근 후에는 피곤함을 감추며 외로웠을 중생을 위해 시간을 같이 보내주려고 애쓴다. 3일이 지나자 전주에 가겠다고 한다. 나의 빈곤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떠나는 날 아침까지 김치를 담아 놓기 위해 바쁘다. 아내는 아침 식사를 하며 집에 있는 강아지에 대한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내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녀석이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다. 

그녀는 119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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