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용차를 운전하여 퇴근을 하는데 도로가 차량으로 엉켜 300미터를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회사에 주차를 하고 시내버스를 탔다. 두 정거장을 가다가 시내버스도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하고 40분이 넘게 정차를 하고 있다. 다시 버스에서 내려 반대편 차선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회사로 돌아와 승용차를 운전하여 처음 운전했던 반대 방향으로 진행을 하였다. 절반쯤 진행하는데 앞선 차량들이 다시 정차하여 있는 것을 보고 다른 길로 우회하여 가까스로 집에 왔다. 평소 20분이면 가능한 거리를 3시간이 걸려 퇴근을 하였다. 제주에 눈이 온 것이다.
제주에 눈이 오면 교통 상황이 심각해진다. 제주의 도로는 평탄하지 않고 고저가 많다. 제주도는 한라산이 하나의 섬으로 이루어져 지형 따라 도로를 건설하다 보니 도로의 업 다운이 심한 편이다. 제주 시내 한복판의 도로조차 경사도가 3-40도에 가깝게 심하다 보니 눈이 오면 차량 진행이 쉽지 않다. 제주는 기온이 높아 평소 눈이 잘 내리지도 않고 내려도 바로 녹아버려 타 지역에 비해 제설장비가 잘 갖춰져 있는 것 같지 않고 눈이 와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리면 그야말로 교통이 엉망이 된다.
제주에 바람이 많다는 말은 눈이 오면 더 실감하게 한다. 제주에서 비가 오면 우산 대신 우의를 입듯이 눈이 내리면 모자가 달린 파카를 입는다. 눈이 바람을 동반하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걸어 다니기도 어렵고, 도로는 물론이고 하늘길과 바닷길이 모두 끊겨 도민은 물론이고 방문객까지 발을 동동이며 연일 전국을 시끄럽게 달군다.
제주의 눈을 겪고 나니 신혼 시절 고속도로에서 차를 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혼을 하고 이듬해 구정에 처갓집에 가게 되었다. 눈이 많이 내려 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으나 신혼 초라 위험을 무릅쓰고 내려가게 되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엉금엉금 기어가는데 만남의 광장을 지나 약간의 오르막에 다다르자 바퀴가 헛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경사가 별로 심하지 않아 다른 승용차들은 그런대로 진행을 하는데 내 차만 유독 헛바퀴를 도는 것이다. 결국 아내가 차에서 내려 승용차를 밀며 오르막을 지나 가까스로 처가에 가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스텔라 승용차를 타고 눈길을 가게 된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때 만해도 전륜과 후륜 구동의 개념이 없던 때라 별생각 없이 후륜인 스텔라를 타고 눈길 고속도로에 겁도 없이 진입하였던 것이다. 그날 고속도로 교통상황을 촬영하던 방송국 헬기에 장착된 카메라에 차를 미는 아내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혀 전국 방송이 되었으니 지금도 눈만 오면 그때 일을 말하곤 한다.
다음 날 버스를 타고 출근을 하여 제주의 제설 시스템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제주에 사는 직원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별 반응이 없다. 생각해 보니 나만 버스에 승용차에 이리저리 요란을 떨었지 다른 승객들은 별 불평 없이 시내버스에 그대로 앉아 있었던 모습이 떠올랐다. 제주 재난 문자에서도 제설에 대한 안내는 별로 없이 통제가 된 구간 알림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라는 알림만 있다. 한 직원이 작년엔 눈 구경하기가 어려웠는데 올해는 눈이 많을 것 같다면서 제주는 눈이 오면 설경이 멋진 곳이 많다면서 운이 좋다고 한다.
제주에서 태어나 학교를 모두 마치고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동료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자신은 어릴 때 자전거를 타면 오르막길이 하도 많아서 도로는 원래 높낮이가 많은가 보다고 생각했고, 비도 사선으로 내려 원래 비는 그렇게 내리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다 서울에 발령이 나서 가보니 도로는 대부분 평탄하고 비도 하늘에서 똑바로 내리는 것을 보면서 제주가 섬이라 그런 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며 웃음을 지었다.
제주에 눈이 오면 시민들은 한라산으로 달려간다. 제주도는 크지 않은 섬이지만 고도 차이가 2000미터 정도 되다 보니 고도에 따른 기온차가 무척 크다. 제주 시내는 눈이 바로 녹지만 한라산 정상으로 갈수록 겨우내 눈이 녹지 않고 멋진 설경을 만들곤 한다. 겨울이면 한라산의 눈꽃과 상고대를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한라산을 가기 어려운 사람들은 1100 고지 휴게소를 방문하여 한라산의 하얀 자태를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하곤 한다.
“1100 도로 교통통제 해제되어 240번 노선버스가 정상 운행” 문자가 떴다. 제주에 눈이 오면 시시각각 도로 통제 상황을 문자로 알려준다. 한라산 cctv로 1100 도로 상황을 확인했다. 많은 차량들이 한라산의 설경을 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나도 시내버스를 타고 1100 고지로 향했다. 버스에는 두툼한 등산복과 모자, 스틱, 아이젠과 같은 방한 장비로 중무장을 한 등산객으로 가득했다. 백록담은 통제가 되어 한라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나선 사람들이다. 아직 장비 준비가 안되어 눈 쌓인 한라산은 엄두가 나지 않아 1100 고지에서나마 한라산의 설경을 보고 싶어 나선 것이다.
1100 고지는 이미 나와 같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차장은 더 이상 차량이 진입하지 못하고 도로 갓길도 차들로 줄지어져 있었다. 눈 덮인 백록상이 처연하게 보였다. 전망 좋은 휴게소에 올라 눈 덮인 한라산을 바라보니 하얀 솜을 덮고 있는 듯 따스한 온기마저 느껴졌다. 다음에는 준비를 철저히 하여 눈 내린 한라산의 비경을 찾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아쉬움을 달래 본다.
몇 일째 눈이 내리고 있다. 모자가 딸린 파카를 입고 군밤장수 모자를 쓰고 장갑을 끼고 등산화를 신고 시내버스를 이용하기 위해 일찍 출근길을 나선다. 이제 제주 사람 다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