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겠지...?
1, 2, 3, 4-1편을 먼저 만나보세요.
[카메라 수난사 Part1 - 추격자 https://brunch.co.kr/@jzjz0219/28]
[카메라 수난사 Part2 - 카메라는 돌아오는 거야! https://brunch.co.kr/@jzjz0219/29]
[카메라 수난사 Part3 - 무소유 대신 풀소유 https://brunch.co.kr/@jzjz0219/30]
[카메라 수난사 Part4-1 - 대단원의 막! https://brunch.co.kr/@jzjz0219/31]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만큼 내용이 꽤나 길어서 2부작으로 나눴다.
마드리드로 떠나는 날. 일찍 조식을 먹고 9시쯤 차를 탔다. 남의 나라에서 운전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인데, 9시간을 가야 하는 대장정에 들어서려니 긴장이 됐다. 짐짓 괜찮은 척하며 바르셀로나 시내를 지나 고속도로에 올라섰다. 한국에서 운전을 안 해본 것도 아니고 다른 나라라도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각종 변수들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먼저 고속도로에는 생각보다 많은 차량이 있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대형 트럭(몬스터 트럭)들이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미국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대형 트럭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옆을 지나갈 때마다 한껏 긴장했는데, 차량이 너무 크다 보니 운전대를 똑바로 잡고 있지 않으면 조금씩 트럭 쪽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손바닥에 땀이 나게 운전대를 꽉 쥐었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도로 폭이 좁다. 고속도로면 조금은 더 넓게 도로 폭을 가질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보다 한 뼘 정도 더 작은 것 같았다(초행길이라 긴장해서 그렇게 느껴진 것뿐일 수도 있긴 하지만). 가는 길 내내 도로 양옆으로 도시라도 많으면 모를까 도로를 넓게 만들어도 전혀 문제없을 것처럼 허허벌판인 곳도 많은데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도 가장 적응되지 않았던 것은 속도였다. 속도제한 표지판에 분명 120이라고 쓰여있다. 120이 제한 속도겠지? 난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120이 제한 속도가 아니라 최저 속도인 건가. 그 도로를 달리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을 거다. 왕복 2차선에서 3차선을 왔다 갔다 하는 도로에서 3차선에는 대형 트럭들이 몰려온다. 그나마 속도가 제일 느려야 할 트럭들이 120 킬로미터 가까이 달리고 있었다. 2차선은 보통 150이었고 추월 차선인 1차선은 적어 도 180은 될 듯한 속도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있었다. 한국에서 웬만해서는 100킬로를 제한으로 두고 120도 밟을까 말까 하는 나인데, 최저 속도를 120으로 가야 한다니!
트럭들 사이에서 3차선으로 가는 것은 최대한 지양하고 싶었다. 정말 한 순간에 쥐포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이랄까. 울며 겨자 먹기로 2차선에서 운전을 하는데, 120으로 밟고 있으면 뒤에 차들이 모두 추월해 간다. 남의 나라에 와서 운전으로 민폐를 끼치는 듯해서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마드리드에 도착할 때쯤 속도에 있어서 만은 스페인 사람이 다 되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악조건 속에서도 운전을 하는 게 큰 무리가 오지 않았던 것은 스페인 운전자들의 매너가 훌륭하기 때문이었다. 운전 중에는 서로 말을 전달할 수 없으니 차량의 움직임, 깜빡이, 비상등 등으로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데, 철저하게 모든 매너를 지켰다. 내 차량이 다소 느려 답답할만한데도 바짝 따라붙지 않고 멀리서 거리를 두고 있다가 추월해 가기도 하고, 트럭들은 내 승용차가 3차선에서 같이 달리고 있으면 쉽게 추월해갈 수 있게 갓길로 붙으며 깜빡이를 켜주기도 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철저하게 차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1차선에서 추월한 차량은 예외 없이 2차선으로 들어왔고 3차선의 트럭은 추월할 때를 제외하고는 3차선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 예측 가능함이 긴 시간의 운전에서 많은 긴장을 덜어내주었다.
고속도로 운전이 익숙해질 즈음에서야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잃어버린 건 잃어버린 거고, 가는 길은 즐겨야지 싶어서 그때부터 맘을 좀 내려놨다. 중간중간 주변에 차량이 없고 직선으로 이어지는 길에서는 살짝 속도를 늦추고 창 밖 풍경을 즐기기도 했다. 그중 몇몇 도시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멀리서도 여행자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당장 대사관을 가야 하는 일만 아니었다면 잠시 들러갔을 텐데 아쉬움이 컸다. 휴게소에서도 2번은 쉬었다. 생전 살면서 스페인의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쉴 거라는 생각은 못 해봤는데, 이것도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구글 지도로는 9시간이면 가는 거리였는데, 도착하고 보니 저녁 10시였다. 중간중간 휴게소에서 쉰 것도 시간을 잡아먹었지만, 초행길이다 보니 원래 이동하는 차량들만큼 속도를 못 낸 것도 한몫했을 성싶다. 예약했던 호텔로 직행했다. 입실하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드디어 대사관 방문날이 되었다. 늦게 일어날수록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는 시간도 늦어질 거란 생각에 7시에 조식을 먹고 바로 대사관으로 갔다. 9시에 딱 맞춰서 대사관을 방문했더니 방문자 1번이었다.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은 꽤나 단출했다. 대기실 같은 공간에 의자 몇 개가 오와 열을 맞춰 자리를 잡고 있고, 직원들은 유리창 안쪽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필요한 서류를 모두 작성하고 임시 여권을 발급받을 때까지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때 또 다른 한국 사람이 들어왔다.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짐도 없이 혼자 들어와서 상당히 곤란한 얼굴로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공간에 민원인은 우리 둘과 그 여성뿐. 안 그래도 귀를 쫑긋 세울만한 상황인데 비슷한 처지인 사람이 아닐까 싶어 직원과 하는 이야기가 속속 들려온다. 보아하니 이 분도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까지 먼 길을 왔다.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렸는지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고 빌려서 왔단다. 여권을 재발급받으려면 돈이 필요한데 그 돈도 없는지 직원에게 사정을 한다. 규정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직원은 어디 어디로 가면 은행이 있는데 거기서 돈을 송금받아서 오셔야 한다고만 하니 얼굴에 그늘만 짙게 드리워진다.
스페인까지 와서 도둑을 만난 동지(?)로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기가 안타까웠다. 특히 우리 마나님은 우리는 둘이라서 그나마 괜찮은데, 저분은 여자 혼자서 힘들 거라며 도와주자 한다. 동병상련이랄까 평소라면 일면식도 없는 이에게 돈을 빌려주는 걸 주저할 만도 한데 이런 상황에서 만나니 그냥 안 받는 셈 치고 주고 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님이 다가가 그녀와 말을 텄다. 이야기를 좀 듣게 되었는데 돈이 없으신 것 같아서 곤란하신 것 같다며 은행까지 가려면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데 우리가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곤란할 때 도움을 받는 사람의 심정은 다 똑같은가 보다. 감사하다며 꼭 은혜를 갚겠다고 연신 인사를 한다. 그렇게 여권을 신청하고 자초지종을 들어봤다. 강남에서 향수 사업을 하는 사장님인데 친구와 스페인을 놀러 왔다 하필 돌아가는 날 가방을 도난당했단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중이었는데, CCTV에 도난당하던 모습이 찍혀있었는지 휴대폰에 받아오셨다. 여행 마지막 날이라 쇼핑도 하고 이쁜 옷 입고 기분을 내러 나왔다가 그런 변을 당한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여권이 나왔다. 향수 사장님한테 조심히 잘 돌아가시라 하고 인사하며 대사관을 나왔다. 여담이지만 마나님은 그 분과 중간중간 연락을 했나 보다. 타지에서 만나 다시 보지 않을 사이라면 도움받고 입을 싹 닦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집으로 라면 박스 정도 되는 큰 상자가 택배로 배달됐다. 빌린 돈을 돌려주신 것은 물론이고 본인이 만드는 다양한 향수와 과자 등을 가득가득 넣어서 보내주신 거다. 마나님 말대로 누군가를 도와주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마드리드까지 그 긴 길을 왔는데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기 전에 동네 구경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 싶어 오전까지는 마드리드에 머무르기로 했다. 돌이켜보니 볼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무엇을 먹을지만 생각했었나 보다. 먹을 것 하면 역시 시장이지 싶어 가장 먼저 산 미겔 시장을 방문했다. 다양한 음식들이 유혹하고 있었지만 메인 요리는 이미 생각해준 것이 있기에 애피타이저로 입맛 당기게 해주는 굴을 먹었다. 굴을 판매하는 DANIEL SORLUT의 무덤덤한 표정의 직원은 목소리와 행동만은 발랄했다. 굴 한 조각에 3, 4유로로 싼 가격은 아니었지만 가방째로 털린 불쌍한 남편에게 기운을 북돋아주고 싶었던 우리 마나님은 맘껏 주문하라며 부담감을 덜어주었다. 마음의 짐을 덜고 태평양, 대서양 등 다양한 바다에서 건진 굴 7개와 무려 캐비어까지 시켜 먹었다.
점심으로는 La taberna de Cascajares로 가서 돼지고기 아사도, 문어 요리, 감바스를 시켜먹었다. 마지막으로 디저트 삼아 산 히네스(San Gines)에서 추로스를 먹었다. 추로스를 많이 먹어 본 것은 아니지만, 바삭한 식감이나 초콜릿에 찍어 먹었을 때의 달콤함은 기운을 북돋아주기에 충분했다.
짧은 마드리드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바르셀로나로 차를 몰았다. 새삼 사람의 적응력이란 게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마드리드를 향해 올 때는 120킬로만 넘어가도 벌벌 떨었는데, 이제는 150을 기본으로 밟고 가면서도 별 감흥이 없다. 주변 차들도 다 나와 비슷한 속도로 가니 150이라는 속도를 체감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밟으면서도 이제는 주변 풍경이 꽤나 눈에 들어왔다. 마드리드로 올 때는 해가 정면에서 지고 있어 선글라스를 껴야지 운전이 가능한 수준이었는데, 바르셀로나로 돌아갈 때는 해가 뒤에서 비치니 풍광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길 옆으로 보이는 기암괴석은 물론이며 지평선 너머 넓게 펼쳐진 자연은 로드 트립의 매력을 강하게 느끼게 해 줬다. 특히나 기억이 강렬하게 남은 건 멀리 만년설처럼 보이는 눈이 긴 산맥의 머리 부분을 장식하고 있던 장면이다. 돌아가는 동안 휴게소에서 딱 1번만 쉬고 운전을 했는데 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진 아름다운 풍경 덕분에 큰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도착했다.
이틀간 1,300킬로미터의 거리를 거의 20시간에 거쳐 왕복하는 나름 고난의 길이었으나 로드 트립이라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한 소중한 길이기도 했다. 사실 스페인에는 내 돈 주고 다시는 안 오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으나, 스페인은 그런 내 다짐을 너무도 쉽게 무너뜨릴 만큼 매력적인 나라임에 틀림없다.
마지막 날 렌터카를 반납하기 위해 리셉션을 찾았다. 우연찮게도 첫날에 병든 닭처럼 힘이 없던 그 남자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쾌활한 말투로 즐거운 여행이 되었냐며 가방은 혹시 되찾았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가방은 못 찾았지만 바르셀로나 여행은 즐겁게 마무리했다고 하니, 안타깝다며 그래도 너무 슬퍼하지 말란다.
왜 인고하니 우리가 도착한 다음날 5명의 독일인 가족이 왔는데 그들도 캐리어 하나를 통째로 도난당했단다. 그 캐리어에 여권, 지갑, 현금, 옷가지 등 여행에 필요한 모든 걸 다 몰아넣은 바람에 여행은 고사하고 대사관에 들렀다 바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들었다나…
나보다 더한 상황을 겪을 그 가족에게 측은한 마음이 드니까 덜 슬퍼지는 건 맞긴 한데… 이 정도면 너희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겠니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떠나는 마당이라 목구멍으로 삼키며 비행기를 타러 갔다.
여담
신혼여행에서 돌아오고 난 몇 달 후, 구글 메일로 한 통의 알림 메일이 전달되었다. 아이폰의 분실 모드를 활성화해놓았는데, ‘iPhone 장비를 찾았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메일이 온 것이다.
지도와 함께 표시된 나의 아이폰은 여전히 바르셀로나에서 기분 좋게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어쩌겠는가 싶어서 아이폰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그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남기며 깨끗하게 아이폰을 보내주기로 했다.
‘I don’t know who you are but I will find you and I will kill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