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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Oct 17. 2018

#2. 은행나무는 영물(靈物)이다

씨를 심고 손자 볼 나이쯤 되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공손수(公孫樹

은행 냄새! 맡아본 경험 있으시죠?

고약한 냄새 때문에 은행이 떨어진 길을 걸어가야 할 때면 혹여 열매를 밟지 않을까 조심하는 일이 벌어지곤 합니다. 고약한 냄새가 신발에 베일까 싶어서 말이죠.

일반적으로 열매를 맺는 나무들은 고약한 악취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는 좋은 향은 고사하더라도 왜 이렇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열매를 맺는 걸까요?

고약한 냄새를 풍김으로써 곤충이나 새와 같은 천적들의 접근을 막고 개체 수를 증식하는 원천(씨앗, 종자)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 때문입니다. 새 생명을 담고 있는 씨앗이 소실된다면 은행나무를 번식하는 일은 요원해 지기 때문에 번식을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일종의 자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행나무는 생존을 위해 어떤 방어체계를 만들어 두었을까요?

익히 알려진 것처럼 악취에 가까운 고약한 냄새가 1차 방어체계라면, 2차는 열매의 성분이 동물의 몸에 닿을 때 옻과 같은 접촉성 피부염을 유발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을 먹으려 한다면 3차 방어체계라고 할 수 있는 딱딱한 껍질을 벗겨 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복통과 설사를 유발함으로써 다시는 열매를 먹고 싶지 않다는 기억을 갖게 하는 4차 방어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음이미지

은행은 싹이 트고 20년 이상 지나야 열매를 맺는 나무입니다. 은행나무는 씨를 심고 손자 볼 나이쯤 되어야 열매를 얻는다고 해서 공손수(公孫樹)라고 불려지는가 하면, 신라의 마지막 태자였던 마의태자와 얽힌 전설로도 유명합니다. 신라가 망하자 금강산으로 발길을 잡았던 마의태자는 여주 신륵사에 잠시 들르게 되는데 여주 강변의 강물을 내려다보며 나라 잃은 슬픔을 탄식하다가 곁에 있는 은행나무 가지를 꺾어서 지팡이를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지팡이를 벗 삼아 목적지인 금강산으로 가게 되는데 용문사에서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이르기를 “이 지팡이가 단단히 뿌리내려 못다 한 신라의 천년 사직을 대신해 달라고 빌었다”는 이야기 때문인지 1000년의 세월을 버틴 용문사 은행나무는 여타 나무를 대하는 것과는 다른 경외감을 자아내곤 합니다.

은행 잎은 화석으로 발견될 만큼 여타 나무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면이 있기도 하지만 화재가 발생해도 잘 타지 않는 특성까지 더하면, 은행나무는 일반적인 나무가 아니라  영물(靈物)에 가까운 나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시월 십 칠일,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실역 주변을 산책하다 보니 벌서 은행잎이 땅에 떨어진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발자국에 짓밟힌 은행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면서, 은행나무는 동물로부터의 방어체계는 완벽하게 구축했지만 사람들로부터 생존을 담보할 수 있는 방어체계는 갖추지 못한 탓에 이리저리 짓 밟힌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물에 가까운 나무지만 사람들의 발길은 피해 갈 수 없나 봅니다.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고 파괴하는 주범이 인간이라는 누군가의 지적이 맞는 것 같아 씁스름한 가을입니다


은행나무의 4단계 생존법칙

1. 고약한 냄새

2. 접촉성 피부염을 유발하는 성분

3. 딱딱한 껍질

4. 생으로 먹을 경우 복통과 설사 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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