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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Aug 30. 2019

#12. 당신의 포스팅엔 색깔이 있다.

자신의 색깔이 드러날 때 세상이 아름다워진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동안 창문을 열어놓고 잠을 청했는데, 이젠 닫아야 할 것 같다. 새벽녘, 불어오는 바람에 잠을 깰 만큼 서늘해진 때문이다.

이제 뜨거웠던 8월도 마지막 한 장을 남겼을 뿐이다. 하늘 구름도 높아져서 바라보고 있으면 눈도 시원해진다.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때문이다.

가을은 책 읽기에 최적화된 계절이다. 선선한 바람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사색의 시간도 가을이 적격이다. 그래서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가을은 누구라도 철학자로 만드는 힘이 있나 보다. 나 같은 속물도 눈 앞을 스치는 만물의 변화를 글로 쓰고 기록하게 만드니 말이다.


요즘 생태 사학자 강판권 교수가 지은 『나무 철학』을 탐독하고 있다. 일전에 한 번 가볍게 읽었는데, 미련이 남아서인지 지금은 정독하는 중이다. 한 줄 한 줄 곱씹으면서 나름의 생각을 더하며 읽다 보니 글로 옮기고 싶은 충동이 요동친다. 『나무 철학』 1부, 제2장에 단풍의 철학에 대한 글이 있다.


나뭇잎의 모양이나 물든 색을 자세히 살펴보면 나무의 색깔, 즉 정체성을 알 수 있다. 어떤 생명체든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때 행복하다. 나무가 잎을 통해 색깔을 드러내듯 사람도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을 때 행복해진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집단성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는 가정, 회사를 막론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살기가 참 어렵다. 쉽지는 않지만 자신을 드러내는 삶의 지향은 삶의 가치를 찾는 일이다.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많은 사람이 가을에 잎이 물든 모습을 보면서 나무를 아름답게 생각하는 것도 나무마다 각각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의 형형색색, 각양각색이 사람을 즐겁게 만드는 것처럼 사람도 각자의 색깔을 드러내야만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

각각의 색깔이 드러날 때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SNS를 활용하여 글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글과 사진을 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하는 쏠림이 생기는 것 같다. 물론 좋은 느낌으로 와 닿는 경우도 있지만 게 중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소개하고 싶은 두 사람이 있다. 필자보다 어리지만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SNS에 올린 글과 사진은 항상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한 번은 우매한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다"  

답을 듣는 순간 SNS에서 느낀 그대로 임을 알 수 있었다.


또 한 사람은 대기업 임원이다. 그분은 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SNS로 공유한다. 필자도 그분의 글을 자주 접하고 “좋아요”를 누른다. 마음은 댓글을 달고 싶지만 애써 참는다. 실례가 될 것 같아서다. 글을 읽다 보면 "합리적 사고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만큼 치우침이 없다. 때가 되면 인사를 드리고 배움도 청하고 싶은 그런 분이다.


셀카 사진을 올리는 사람, 음식이나 여행 사진, 필자처럼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사람, 교육 관련 종사자가 많은 탓에 교육장 사진이나 오고 가는 과정, 느낌, 각오, 감사일기, 그리고 자기 근황, 게 중엔 자기 홍보성 글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은 양하다. 

SNS에 올린 내용물을 접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주요 관심사와 자기표현 방식이 읽힌다. 물론 SNS만으로 그 사람을 단정 짓는 건 위험한 생각이다. 다만 약간의 힌트를 얻는 수준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SNS에 오른 글과 그림이 사회적 건전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존중되어야 한다. 글의 주인공이 자신의 인생 여정 한 토막을 누구의 허락을 받고 올려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필자도 좋지 않은 뉘앙스로 판단했던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글을 올리면서 위축된 적도 여러 번이다. 아마도 강판권 교수가 언급한 것처럼 “집단성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는 가정, 회사를 막론하고 개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살기가 참 어렵다” 는 생각 때문일 게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자기 정체성 중 일면을 SNS라는 수단을 빌어 드러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숨을 쉬고 있는지 모른다. 필자도 미친 듯이 글을 쓰면서 답답한 심정을 토하는 숨을 쉬고 있기 때문이다.


강판권 교수는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야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가장 자기 다운 모습을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나라 나뭇잎은 붉은색보다 노란색이 더 많다. 뿐만 아니라 어떤 잎도 같은 단풍이 없을 만큼 다양한 색감을 표출한다. 그래서 아름답고 친근함을 느낀다.

나만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색(?)을 갖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있어도 보이지 않고 없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처럼 취급된다면 너무 슬픈 인생 아니겠는가? 모르긴 해도 내가 누군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 같다. 사색의 계절, 천고마비의 계절, 만산홍엽의 계절, 가을이다. 왔나 싶으면 가버릴 만큼 짧은 계절이지만, 자기 정체성의 한 자락을 정립하는 시간으로 채워지는 가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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