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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범 Jun 10. 2020

그해 겨울, 기억의 맛을 더듬다

걷 보기와는 다르게 씹을수록 찰진 식감, 풍부하고 깊은 감칠맛, 한 국자 떠서 들이키면 속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국물 맛은 덤이었다. 우리 집 엄마표 비빔국수를 만들 때도 들어가고, 펄펄 끓는 설렁탕에 칼칼한 맛을 더하기 위해 반드시 넣어야 했던 국물, 빈대떡을 만들 땐 빠질 수 없는 주 재료였고, 콩나물국밥과 이것 한 접시면 세상 부러울 게 없었던 기억의 맛을 더듬어본다


고등학교 때니까 얼추 사십여 년 전 이야기다. 겨울 초입 일요일 아침, 엄마는 생선을 나무궤짝으로 사 오셨다. 한두 마리도 아니고 궤짝 생선에 놀란 나는 이렇게 많은 생선을 언제 다 먹느냐며 따지듯 물었더니, 쓸데없는 참견 말고 내장 빼고 머리와 꽁지를 잘라낸 후 씻어놓으라는 핀잔 같은 주문이 돌아온.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시키는 데로 생선을 정리했다. 그 사이 엄마는 나무 도마를 가지고 나오시더니 크기에 따라 5~6등분으로 토막 내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생선 토막 작업을 쳐다보고 있는데,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집 김장을 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때만 해도 김장철이 되면 이웃 간에 김장 품앗이가 흔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김장은 이웃 간에 서로 돕는 년 중 행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더구나 양도 많아서 하루에 처리할 수도 없었다. 첫날은 배추를 다듬고, 소금에 절이고, 씻고, 절인 배추의 물을 빼는 작업이 필요했다. 이튿날 이른 아침이 되면 본격적으로 배추 속을 만들기 위한 작업과 함께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그날도 엄마가 시키는 데로 마루에 넓은 비닐을 펴고 작은 다라를 인원수만큼  갖다 놓았다. 일이 끝나기 무섭게 예측된 다음 지시가 떨어진다. 새벽까지 물을 뺏던 절임 배추를 다라마다 몇 포기씩 가져다 놓으라는 것이다.


우리 집은 매년 100통씩 배추김치를 담갔다. 그 외에도 갓김치, 파김치, 동치미등 서너 종류의 김치를 담근다.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많은 양이지만 그땐 일반적인 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한겨울을 나지 못했다. 여덟 식구가 먹는 것도 있지만 이웃끼리 김치를 소재로 한 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 일이 많아서, 항상 겨울이 끝나기 전에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김치를 절이고 씻는 것도 일이지만, 무채를 써는 일도 만만치 않다.  배추 100통들어갈 양을 만들어야 하는 만큼 농땡이도 못 피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채가 완성되지 못하면 김치 속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각종 야채를 썰어 넣는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부지런을 떨어야 했다. 그뿐이 아니다. 앞마당에 김치 독을 묻는 일도 항상 내 몫이었다. 남자라고 해봐야 아버지와 나뿐이다. 적어도  길 이상 땅을 파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그것도 구덩이 하나로 끝날 일이 아니다. 어떤 해에는 다섯 구덩이를 팠던 적도 있었다. 물론 작은 구덩이는 빼고 말이다. 다섯 명의 여동생은 삽 집을 할 수 없으니 부탁도 못한다. 오로지 아버지와 내가 해결해야 하는 몫이었다. 당시만 해도 겨울 날씨가 무척 추웠기 때문에 지상에 독을 놓아둘 순 없었다. 김치가 얼기 때문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땅에 묻는 방식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처럼 김치냉장고가 있었다면 그런 수고가 필요 없겠지만, 그땐 그런 시절이 아니었다.

우리 집은 싱겁게 먹었기 때문에 김치 속을 만들 때면 짜네, 싱겁네 하는 아주머니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저마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간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은 우리 엄마 몫이다. 입맛 까다로운 아버지 입맛에 맞춰야 해서다. 무채와 각종 채소류, 젓갈, 밥풀, 그리고 싱싱한 굴을 넣은 다음 고춧가루와 버무린 배추 속이 완성되면, 기본 준비가 끝난 셈이다. 이제 배추에 김치 속을 넣을 차례다. 이때부터는 정말 정신이 없다. 마당에서 마루를 오가면서 절임배추 공급하랴, 속이 꽉 찬 배추를 마루에서 마당에 묻은 독으로 옮기랴, 중간중간 엄마의 주문까지 해결하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만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한 바탕 정신없는 시간을 보낸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김장 도사들이다. 슥슥, 배추 속을 어찌나 쉽게 넣던지 이내 김장 김치가 수북하게 쌓이기 시작한다. 김치 담그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판단해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인권이 엄마는 어찌나 깔끔하게 배추 속을 넣는지, 먹기도 아까울 만큼 예쁜 포기김치를 만든다. 하지만 장군 엄마는 털털함 그 자체다. 깔끔 김치와는 확연히 비교되는 비주얼 김치를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엄마표 김치도 털털한 장군 엄마와 비슷한 김치를 만든다. 완성된 김치를 보면 누가 만든 것인지 구분할 만큼 차이가 뚜렷했다. 그렇게 배추 감상을 하면서 정신 줄을 놓고 있을라치면 어김없이 엄마의 주문이 떨어진다. 아침에 잘라놓은 생선을 김장독 옆에 갖다 놓으란다. 물론 무채를 만들고 남은 자투리 무도 포함해서 말이다. 드디어 생선이 쓰일 때가 된 것인가? 의문을 품으면서 엄마의 주문대로 생선과 자투리 무를 독 옆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웬걸, 엄마는 묻어 놓은 독에 김치를 두 칸 정도 쌓더니 난데없이 잘라놓은 생선 토막을 넣는 게 아닌가? 자투리 무를 넣는 건 당연했지만, 생선을 넣는 건 당시만 해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다.


"엄마, 김치에 생선을 넣으면 어떻게 해, 비린내 나잖아?"

"괜찮아, 엄마가 옆집에서 배운 거야, 김치가 익으면서 생선도 함께 삭으면 맛있거든"

"먹어봤어"

"그럼, 옆집은 해마다 그렇게 해, 엄마가 가서 도와주면서 배웠지, 정말 맛있더라, 그래서 한번 해보는 거야"

"이해가 안되네, 비린내 나지 않을까?"

"걱정 마, 비린내 없는 김치 맛을 보게 될 거야, 생선 식감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지..."

"실패하면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해 그냥 먹으면 되지"

"..."

"어떻게 하는지 봤지, 엄마가 한 것처럼 김치 두 칸 넣고, 토막 생선하고 자투리 무 적당히 넣고, 알았지?"

"네"


해마다 김장을 도왔지만 생선을 넣은 것은 그해가 처음이었다. 서울 토박이인 내게 김장과 생선은 이해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생선 품은 김치는 정말 최고의 맛을 선사했다. 삭힌 생선이 어찌나 맛있던지, 밥사발에 꽁보리밥을 수북하게 담은 것도 모자라서, 한 사발을 더 먹을 만큼 밥도둑이 따로 없는 맛이었다. 아삭하고 시원한 김치 맛도 일품이지만, 무엇보다 삭힌 생선임에도 씹을수록 느껴지는 찰진 식감과 감칠맛은 표현이 쉽지 않은 맛을 선사했다.  

생선을 넣은 김장은 그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입 맛 까다로운 아버지의 입맛에는 맞지 않아서다. 나와 동생들은 엄마가 살아 계실 때 김장철이 되면 입버릇처럼 생선 넣은 김장을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아버지 입 맛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 까지 사십 년이 넘도록 그런 김치를 맛보지 못했다. 엄마가 단명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생선 품은 김치 맛을 다시 맛 볼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아버지의 반대가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지금은 그때처럼 많은 양의 김장을 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절인 배추 포기로 스무 개  남짓 담그니까 김장이라 할 것도 없다.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도 그 정도의 양에 생선을 넣는 건 좀 이상하기도 하고 제대로 삭힐지도 의문이다. 뿐만 아니라 김치냉장고에서 숙성하는 상황인데, 땅속 항아리에서 김치와 함께 숙성된 맛을 기대하는 건 무리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도 내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제대로 삭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김치를 많이 담가서 오랫동안 숙성시켜야 하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러고 보면 그때의 김치 맛은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맛이 되어 버렸다. 찬 밥 한 덩이를 물에 말고, 김치 대가리만 잘라서 밥상을 차려도 그렇게 맛일 수가 없었다. 한 손엔 밥숟가락을, 또 한 손에 김치 한 줄기를 집어 들고 어구 적거리면서 먹었던 그 시절 생선 품은 김치는 늘 먹던 음식이 아니었다. 별미 중에 별미가 따로 없을 만큼 각별한 요리였다. 다른 음식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그런 음식 말이다. 글을 쓰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지금도 입 안에 침이 고이는 걸 보면, 그때의 김치 맛은 혀도 잊지 못하는 그런 맛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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