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랑 도넛이랑 치킨이랑 피자랑 마구 흡입했습니다. 아파서 그랬습니다.
저번 주.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자려고 눕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 모르긴 몰라도 내일 무진장 x됐다."
사람의 감이라는 게 참 무섭다. 그간 쌓여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견하다니.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아니, 눈을 떴다기보다는 정신만 깨어났을 때 느꼈다.
"몸살이구나."
점심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서점으로 출근하는 길에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몸살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지."
내 몸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동의했다. 내 몸에서 분리될 침도 동의했으니 말 다했지. 그래서 햄버거를 샀다. 콜라도 마시고.
그런데도 몸이 낫지 않았다.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조퇴했다. 가는 길에 던킨 도너츠를 사갔다. 왜 사갔냐면, 몸살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 도넛. 엄청나게 맛있었다. 근데, 글레이즈드는 맛없었다. 마치, 포장지가 없는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당연히 오리온의 맛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입안 가득 퍼지는 롯데의 맛. 그런 실망감? 글레이즈드는 실망이었고 바바리안은 오... 리얼이었다. 바바리안만 10개 살걸. 이 날 먹은 것만 해도 어마무시하다. 피자, 치킨, 도넛, 햄버거, 탄산... 분명 장이 욕했을 거다. 장기들아, 아프니까 한 번만 봐줘. 부탁이야.
성공한 사람은 자위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성공한 사람도 자위한다. 자기 합리화 안 하는 사람이 어딨겠나. AI도 자기 합리화를 한다. 아니, 자기 합리화보다는 뭐랄까, 뻔뻔하다.
삶의 중용이란 이런 뻔뻔함이 아닐까.
'일이 어그러졌다고? 나 때문에? 아, 쏘리.'
름돈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얼굴이 벌게져서 "아, 그게 있지..."가 아닌, "아, 그냥 내가 만든 단어야. 다시 시작할게."라고 대답하는 뻔뻔함.
토요일, 아니, A형 독감 내내 겁나 먹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 나으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합리화는 스트레스 중용에 있어 가장 탁월한 행위이다.
내 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는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온다. 내 의식이 사라져, 내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는 그 순간. 그 순간이 오는 게 너무 무섭다. 중경삼림에 나오는 금성무의 말을 빌려, 내 수명에 유통기한을 정할 수 있다면 딱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만 년 즈음 살면 삶에 대한 미련도 사라질 텐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외려 "아니, 그럼 좀 더 과감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누구한테 평가받으려고 사는 삶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삶인데."라는 어떤 다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죽으면 끝이다.' 이 문장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더 과감하고 뻔뻔하게 만든다. 어떤 것에도 조바심 느끼지 않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중용. 결국 중용이라는 것은 죽음이란 두려움을 넘어섰을 때의 보상 같은 건 아닐까. 뭐든지 적당히. 과하지 않게끔만.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끔만.(근데 이게 참... 평균이 어렵다. 뭐든지 중간만 가는 게 가장 어렵다. 사실 평균이란 건 없는 수치니까. 이런 놈 저런 놈 다 모아놓고 매긴 평균값에 딱 부합되는 보통의 사람은.... 없지 않나요? 중산층에서 태어나 중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아닌 중기업에 취직해 월세도 자가도 아닌 전셋집에 사는 30대 중반의 평균 키와 평균 몸무게를 지닌 사람? 아... 이 정도면 보통 인간 아니라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제는 담배생각이 잘 안 난다(라고 말하면 바로 다음 날이나 다다음 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상황이 옵니다. 이게 참, 저는 항상 확언, 확신, 지레짐작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아....).
몸도 이제 정상 궤도에 올랐으니, 다시 평소의 루틴으로 돌아가야겠지. 게으름이란 쾌락을 이길 수 있는 게 없다.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행복과 쾌락을 혼동해서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정해진 루틴대로 하루를 온전히 살았을 때의 그 행복감(혹은 만족감)은 대북을 느리지만 일정하게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쾌락에서 오는 쾌감은 누군가를 고무시키려는 듯 대북을 연주하는 느낌이었다. 이 두 가지의 연주를 적절히 섞어야겠다. 중용. 중용합시다! 중용(重用)되고 싶으면 중용(中庸)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