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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olumnlist Jan 26. 2024

인생에는 중용이 필요하다

햄버거랑 도넛이랑 치킨이랑 피자랑 마구 흡입했습니다. 아파서 그랬습니다.

저번 주.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자려고 눕자마자 느낌이 왔다.

"아, 모르긴 몰라도 내일 무진장 x됐다."

사람의 감이라는 게 참 무섭다. 그간 쌓여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견하다니.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아니, 눈을 떴다기보다는 정신만 깨어났을 때 느꼈다.

"몸살이구나."

점심을 먹어도 배가 고팠다. 서점으로 출근하는 길에 이런저런 고민을 했다.

"몸살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지."

내 몸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동의했다. 내 몸에서 분리될 침도 동의했으니 말 다했지. 그래서 햄버거를 샀다. 콜라도 마시고.

그런데도 몸이 낫지 않았다. 사장님께 말씀드리고 조퇴했다. 가는 길에 던킨 도너츠를 사갔다. 왜 사갔냐면, 몸살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아, 도넛. 엄청나게 맛있었다. 근데, 글레이즈드는 맛없었다. 마치, 포장지가 없는 초코파이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의 느낌이었다. 당연히 오리온의 맛을 생각했는데, 갑자기 입안 가득 퍼지는 롯데의 맛. 그런 실망감? 글레이즈드는 실망이었고 바바리안은 오... 리얼이었다. 바바리안만 10개 살걸. 이 날 먹은 것만 해도 어마무시하다. 피자, 치킨, 도넛, 햄버거, 탄산... 분명 장이 욕했을 거다. 장기들아, 아프니까 한 번만 봐줘. 부탁이야.

 



성공한 사람은 자위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성공한 사람도 자위한다. 자기 합리화 안 하는 사람이 어딨겠나. AI도 자기 합리화를 한다. 아니, 자기 합리화보다는 뭐랄까, 뻔뻔하다.

삶의 중용이란 이런 뻔뻔함이 아닐까.

'일이 어그러졌다고? 나 때문에? 아, 쏘리.'

름돈이 뭐야?라고 물었을 때, 얼굴이 벌게져서 "아, 그게 있지..."가 아닌, "아, 그냥 내가 만든 단어야. 다시 시작할게."라고 대답하는 뻔뻔함.


토요일, 아니, A형 독감 내내 겁나 먹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다 나으면 다시 시작하면 되지.

합리화는 스트레스 중용에 있어 가장 탁월한 행위이다.


 내 안의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이다. 죽는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온다. 내 의식이 사라져, 내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조차 사라지는 그 순간. 그 순간이 오는 게 너무 무섭다. 중경삼림에 나오는 금성무의 말을 빌려, 내 수명에 유통기한을 정할 수 있다면 딱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만 년 즈음 살면 삶에 대한 미련도 사라질 텐데.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외려 "아니, 그럼 좀 더 과감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죽으면 끝인데. 누구한테 평가받으려고 사는 삶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게 삶인데."라는 어떤 다짐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죽으면 끝이다.' 이 문장이 역설적이게도 나를 더 과감하고 뻔뻔하게 만든다. 어떤 것에도 조바심 느끼지 않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중용. 결국 중용이라는 것은 죽음이란 두려움을 넘어섰을 때의 보상 같은 건 아닐까. 뭐든지 적당히. 과하지 않게끔만.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끔만.(근데 이게 참... 평균이 어렵다. 뭐든지 중간만 가는 게 가장 어렵다. 사실 평균이란 건 없는 수치니까. 이런 놈 저런 놈 다 모아놓고 매긴 평균값에 딱 부합되는 보통의 사람은.... 없지 않나요? 중산층에서 태어나 중위권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도 중소기업도 아닌 중기업에 취직해 월세도 자가도 아닌 전셋집에 사는 30대 중반의 평균 키와 평균 몸무게를 지닌 사람? 아... 이 정도면 보통 인간 아니라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데...)


 이제는 담배생각이 잘 안 난다(라고 말하면 바로 다음 날이나 다다음 날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상황이 옵니다. 이게 참, 저는 항상 확언, 확신, 지레짐작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아....).

 몸도 이제 정상 궤도에 올랐으니, 다시 평소의 루틴으로 돌아가야겠지. 게으름이란 쾌락을 이길 수 있는 게 없다.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행복과 쾌락을 혼동해서라고. 정말 그런 것 같다. 정해진 루틴대로 하루를 온전히 살았을 때의 그 행복감(혹은 만족감)은 대북을 느리지만 일정하게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쾌락에서 오는 쾌감은 누군가를 고무시키려는 듯 대북을 연주하는 느낌이었다. 이 두 가지의 연주를 적절히 섞어야겠다. 중용. 중용합시다! 중용(重用)되고 싶으면 중용(中庸)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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