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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아로운 생각 Aug 30. 2024

마케팅 상무 퇴직자가 MZ 사장에게 마지막으로 들은 말

#퇴직 4년차ㅣ대기업 마케팅 상무 이야기


저는 흑석동에 사는 50대 후반으로 퇴직한 지 4년 된 사람입니다. 제가 근무했던 회사는 생활용품부터 가전제품까지 의식주에 관한 모든 제품을 제조, 유통, 수출하는 소위말해 글로벌 기업이었지요.

     

그곳에서 제가 주로 한 업무는 마케팅이었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마케팅 업무를 선호하는데요, 그건 소위말해 끗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산이나 인력 사용이 비교적 여유로운 편이고, 회사 대부분 부서가 마케팅팀 도움 없이는 성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사내 조직 중 가장 핵심적인 부서로 여겨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부서에서 한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렸던 저 역시, 퇴직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오너가 콕 찍어, 외국계 기업에서 잔뼈가 굵은 마케터를 영입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찬밥 신세가 되었지요. 코로나가 터지면서 변화하는 홍보 트렌드에 대응하지 못했다는 게 회사의 평가였습니다.

     

다행히 저는 퇴직 후에 곧바로 재취업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전화를 한통 받았는데요. 현직에서 알고 지냈던 거래처 이사님이었습니다. 자기가 새로운 사업에 참여하게 됐는데 함께 하지 않겠냐고 묻더군요. 그러면서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물주는 따로 있으니 저는 마케팅에만 집중해 주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물주라는 사람은 이미 제조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현재는 생산한 제품들을 국내 기업에다 OEM 납품하고 있는데, 자기 브랜드 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공장 역사도 30년이나 됐으니 생산에 대한 노하우는 확실하다고도 했어요. 듣고 있는데 믿음이 가더라고요. 그래서 별다른 고민 없이 단번에 오케이를 했습니다.    

  

며칠 뒤 사장을 만나는 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이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완전 딴판이었습니다. 사장 나이가 서른도 안 돼 보였어요. 알고 보니 공장은, 저를 만나러 나온 사장이라는 사람의 아버지 소유였습니다. 사장이 대학 졸업 후 몇 년간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아버지에게 자기 사업을 해보겠다고 졸랐다더군요.      


참, 난감했습니다. 일이야 하면 그만이지만 서른도 안 된 친구를 사장으로 모신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요. 과연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더군요. 결국 함께 하기로 마음먹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처음에는 아무 문제없었습니다. 저도 사장을 예우했고 사장도 저에게 예의 바르게 행동했습니다. 제 딴에는 제 입에서 혹시나 반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참 많이 신경 썼습니다. 사장은 사장대로 사소한 일은 본인이 직접 처리하며 저를 존중해 주는 느낌이었고요. 그러다 보니 부딪힐 일 없었습니다.     

 

다행히 5개월 만에 제품 생산을 완료했습니다. 모두가 의기투합했던 결과였지요. 그런데, 참, 우리나라에서 기업 하는 거 정말 쉽지 않더군요. 결정적으로 가장 중요한 유통망을 뚫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제품은 다 만들어놓았는데 팔 곳이 없어 창고에 쌓아두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언제부터인가 회사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사님, 저 좀 보시죠”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회의실로 저를 불렀습니다. 따라 들어가 보니 딱 한마디 하더군요. “이사님이 영업 좀 해오세요” 말인즉슨, 저더러 이전에 다녔던 회사에 가서 제품을 팔아오라는 거였습니다. 이대로라면 회사가 언제 문 닫을지 모른다면서 빨리빨리 움직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에 저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제가 그 회사에 들어가기 전, 조건으로 내건 게 딱 하나였거든요. ‘예전 회사에 가서 손 벌리지 않게 한다’ 그뿐이었습니다. 제가 현직에 있을 때 퇴직한 선배들이 회사에 찾아와 기웃거리는 모습이 정말 보기 싫더라고요. 그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서 미리 못 박아 둔 건데 언제 그랬냐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일은 다해도 그 일만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이사님, 잠시 봬요” 며칠 뒤 사장이 또다시 저를 회의실로 불렀습니다. 왠지 감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자마자 사장이 한마디 하더군요.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책상 위에 툭 올려두는데 흰 봉투에 담긴 것이 돈 같았습니다.    

  

“혹시, 짐을 싸라는 말인가요?” 제가 당황해서 묻자 사장이 곧바로 그렇다고 대답하더군요. 순간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그 와중에 드는 생각은, 어차피 사장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왔을 테니 매달려 봤자 소용도 없고, 추하게 굴어서도 안된다는 거였습니다.      


“언제까지 정리하면 될까요?” 연이어 제가 물었습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사장의 말은 이랬습니다. “더 끌 필요 있나요?  지금 나가셔도 됩니다”..... 그 말 뒤, 저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섰습니다.   

 

“밖에 춥나?” 회의실에서 나오니 여사원이 제 눈치를 살피더군요. 그래서 평소와 다름없는 어투로 날씨 얘기를 한마디 건넸습니다. 솔직히 그 순간, 밖이 아무리 춥다한들 제 맘보다야 추울 수 있었을까요. 그때 제 기분은 얼어붙은 바닷속 한가운데에 맨몸으로 던져진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퇴직 후 처음 들어간 회사를 나왔습니다. 나중에 전해 들은 바로는 사장이 책상 위에 올려놓은 봉투 안에 백만 원이 들어있었다고 하더군요.  제 8개월 시간의 퇴직금 명목인 것 같았습니다.


이후 제가 한동안 아팠습니다.

여러분들은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유튜브 '퇴직학교'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WlQ7CU2wmAc?si=JvuutuDwzqbnuH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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