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4년차ㅣ식품회사 영업본부장 이야기
저는 영등포에 사는 50대 후반입니다. 제가 회사를 나온 지도 벌써 4년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식품 제조 회사에서 영업본부장까지 하다가 임금피크제 시기가 되어 회사를 떠나게 되었지요.
제가 다녔던 회사, 브랜드 이미지는 좋았지만 내부적으로는 잡음이 참 많았습니다. 위계질서도 중시되었고 보수적인 면도 강해서 특히 젊은 사원들의 이직률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일하기도 쉽지 않아 특정 지방권은 죽음의 지역으로 불리기까지 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제가 퇴직 전 2년을 근무했습니다.
희한한 것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직장생활도 소중하게 느껴졌다는 거였습니다. 회사에 다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만 하면 그저 고마운 마음뿐이었다고나 할까요.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도 홀가분한 기분은 잠시뿐, 이내 암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딱 한 달을 쉬고 나자 서서히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상황은 제 맘 같지 않았습니다. 가진 재주라고는 물건 파는 것밖에 없다 보니 불러주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는 습관적으로 이력서를 내게 되었고, 내더라도 연락은 기다릴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요, 이제껏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 그 일은 바로, 통장입니다. 길 가다가 통장 모집 현수막을 보았는데 저거라도 해야겠다 싶더군요. 동네 통장이라고 하면 나이 먹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그 일을 요즘 제가 하고 있습니다.
동사무소에 지원 서류를 제출하고 며칠 뒤, 면접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참, 그것도 면접이라고 엄청나게 떨리더군요. 미리 예상 질문을 숙지하고 갔는데도 심장이 벌렁거렸습니다. 3대 3으로 진행된 면접의 면접관은 동장님과 통장님이었는데 왠지 온몸이 굳는 것 같았습니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해 주세요” 첫 질문에 대답할 때 긴장은 극에 달했습니다. 대답하는 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지요. 다른 지원자들도 안절부절못하기는 매한가지 같았습니다. “본인이 통장으로 뽑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세요” 이어지는 질문에도 평소의 여유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를 가장 당황하게 만든 질문이 있었는데요. “작년에 12통에서 태어난 신생아 수가 몇 명이지요?” 면접관이 묻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었거든요. 머리가 하얘졌습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도무지 알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대답하려고 우리나라 출산율 수치를 더듬어 보고 있는데 첫 번째 면접자가 대답했습니다.
“열 명입니다” 목소리 톤이 왠지 확신이 없는 느낌이랄까, 그 사람 역시 멘붕인 것 같았습니다. “스무 명입니다” 이어 답한 또 다른 사람도 그냥 찍은 것 같았습니다. 다음이 제 차례인데 큰일 났다 싶었지요. 결국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모르니까 모른다고 할 수밖에요.
“스무 명이었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면접을 끝내고 나오니 지원자 하나가 또 다른 지원자에게 이렇게 묻더군요. 제가 보기에는 둘 다 모르긴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각자가 꽤나 진지해 보였습니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뒤 주민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통장에 합격했다고 말입니다. 와, 정말 기뻤습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합격 소식인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통장이 되었고 지금 3개월째 일하고 있습니다. 매달 급여 40만 원에, 수당과 일 년에 두 번 40만 원씩 상여금을 합치면 연봉 600만 원 일자리를 얻은 셈이지요.
지금까지는 할 만합니다. 한 달에 한 번, 동네 소식지 나눠주는 일은 현관문 앞에 놔두기만 하면 되고, 기초생계 수급자에게 종량제 봉투를 나눠주는 일은 몇 분 안 되어 큰 시간 안 들어가고, 전입신고자 확인하는 일도 월에 열 건 미만이니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민등록 사실 조사입니다. 1년에 한 번 하는 연중 가장 큰 행사인데요, 쉽게 말해 정부가 우리 국민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과정이라고 할까요. 이 일 때문에 요즘 제가 많이 바빠졌습니다. 방문조사가 필요한 집들은 통장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확인을 해야 하거든요. 며칠 해봤는데 대부분 집이 비어 허탕을 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 때문에 통장을 그만두는 이들도 여럿 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남은 임기만큼은 열심히 해 볼 생각입니다. 조사가 끝나면 다른 아르바이트도 다시 알아보려 합니다. 어차피 앞으로도 제가 풀근무를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요.
모든 분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유튜브 '퇴직학교'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hpZoVUwtyHI?si=I0HPKcTsmSEklN_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