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드를 어떻게 밥으로 먹어?"
다이어트 좀 한다는 사람들이 끼니를 샐러드로 대신하는걸 보며 했던 생각이다. 인생은 먹으려고 사는 건데 고작 풀 몇 조각으로 입의 즐거움이 채워질리가 없었다. <나 혼자 산다>에서 성훈이 트레이너의 특명을 받고 밥 대신 샐러드를 드레싱 없이 먹으려다 실수로(?) 소스그릇을 샐러드에 떨어뜨리는 장면은 삶의 희로애락이 농축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무엇보다 샐러드는 주식이 아니라 식탁의 영원한 조연 아니었던가. 메인 음식이 나오는 순간부터 찬밥신세가 되는 서글픈 운명을 타고 난 녀석이었다.
그랬던 샐러드가 신분상승을 했다. 다이어트와 간편식 붐이란 사다리를 타고 당당히 메인디쉬로 올라섰다. '샐러드'라는 음식이 의미하는 대표이미지도 바뀌었다. 예전에 샐러드라 불리던 것은 주로 양상추를 기본으로 양파, 옥수수, 올리브 같은 非풀떼기 야채들이 포인트로 올라가며 샐러드의 '맛없음'을 감추기 위한 크리미한 드레싱이 듬뿍 뿌려지곤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샐러드만으로도 배가 불러야할 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맛있어야 하는 음식이 됐기에 사정이 많이 다르다. 연어, 새우, 아보카도, 스테이크 등등의 고급 식재료가 토핑되고 잡곡이 베이스로 들어가기도 한다. 드레싱은 여전히 크리미한 종류들이 인기가 많긴 하지만 다이어트를 빡세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발사믹, 올리브유, 비니거 같은 초경량 드레싱도 등판했다.
그렇다. 발사믹, 올리브유, 비니거. 뿌린듯 안 뿌린듯한 이런 뿌안뿌 드레싱들이 메뉴 선택지에 있다. 라떼는 생각도 못해봤던 옵션이다. 그때는 식전빵을 올리브유에 찍어먹는 것도 생소하던 시절이었다.
대학시절 나는 친구와 둘이서 유럽 배낭여행을 갔었다. 배낭여행 때 식비를 아끼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친구와 나는 하루에 두끼만 먹는 것으로 나름 절약을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면 늘 9시가 넘어 있었기 때문에, 조식타임이 끝나기 직전인 10시에 숙소 식당에 겨우 내려가 본의 아니게 브런치를 하곤 했다. 다른 손님들이 한바탕 쓸어가고 초토화된 음식 테이블 사이에서 그나마 살아 남은 빵과 커피, 요거트를 구출해내 요기를 하고 나면 점심을 또 먹기엔 애매한 시간이 돼버렸다. 그러고보면 어떻게 그땐 두끼만 먹고 그렇게 빨빨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친구는 지금 양평에서 아이 넷을 키우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고, 나는 그때의 우리와 같이 체력과 웃음이 바닥날 줄 모르는 이십대 초반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을 하며 살고 있다.
아무튼 그 배낭여행 중 이탈리아 로마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도 숙소에서 아점을 해결하고 하루종일 신나게 관광을 한 후 이른 저녁식사를 했을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맛집 검색 같은걸 할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던 데다, 종이 지도를 펴들고 가이드북에 소개된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기엔 로마의 더운 날씨와 엄청난 관광객 인파 속에서 지칠대로 지쳐 있었던 우리는 배가 고프기 시작한 그 순간 가장 가까이 있는 파스타집에 들어갔던 것 같다. 파스타의 본고장이니 뭘 먹어도 기본은 할 것이란 기대를 안고.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기본'과 그들의 '기본'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메뉴판에서 익숙한 이름 몇 가지를 골라 주문했다. 까르보나라와 참치 샐러드, 그리고 아마 피자를 시켰을 것이다. 마르게리타 정도가 아니었을까. 싸이월드에 그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을텐데 아직 복구 중인지 세번의 본인인증 끝에 접속한 내 미니홈피는 텅 비어있었다. 벌써 16년 전이라 가물가물하지만 까르보나라와 참치 샐러드를 시켰던 건 틀림없이 기억한다. 왜냐하면 주문이 잘못 들어간줄 알았을 정도로 기대와는 다른 음식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몇번이고 이렇게 물었기 때문이다.
"이게 까르보나라야?"
부드럽고 느끼한 크림소스에 면을 흠뻑 담구고 있는 새하얀 까르보나라 대신, 계란 스크램블 같은 것에 비벼진(?) 누리끼리하고 건조한 정체모를 면요리가 나왔다. 요즘에야 유튜브에서 까르보나라에는 크림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열변을 토하는 이탈리안 요리사들을 쉽게 볼 수 있기도 하고 정통 방식대로 까르보나라를 만드는 레스토랑도 많아졌지만, 홍대 앞 소박한 파스타집에서 파는 흥건한 소스빨의 스파게티들이 그때까지 먹어본 최고의 이탈리안 음식이었던 우리에겐 충격적인 비주얼이 아닐 수 없었다.
파스타도 파스타지만 샐러드 역시 헛웃음을 짓게 하는 맛이었다. 이토록 식재료 본연의 맛을 그대로 살린 샐러드라니. 풍성한 풀떼기들과 통조림 참치살, 그리고 샐러드의 '맛없음'을 감춰줄 달콤 짭짜레한 드레싱 대신 뿌안뿌 올리브유가 한두바퀴 정도 둘러져 있을 뿐이었다. 참치라도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었다. 메뉴 중에는 '그린 샐러드'도 있었는데, 샐러드가 그럼 그린이 아닐수도 있냐며 깔깔거리고 웃었던 우리는 옆 테이블에서 주문한 그린 샐러드의 실물을 보고 그나마 참치 샐러드를 선택했던 것에 심히 안도했다. 그린 샐러드는 정말 그냥 '그린'이기만 했다. 이토록 이름값에 충실하는 샐러드라니.
사실 드레싱은 칼로리가 엄청나다. 성훈의 트레이너가 드레싱을 빼고 먹으라 한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특히 라떼는 시절부터 많이 먹었던 허니머스타드, 시저소스, 사우전아일랜드, 렌치소스 등등 샐러드의 '맛없음'을 효과적으로 감춰주는 끈적한 소스들이 칼로리 깡패들이다. 몸매를 생각해서 낮12시 이후에는 카푸치노도 마시지 않는다는 이탈리아 사람들이 샐러드에 올리브유나 발사믹 정도만 뿌려 먹는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튼 샐러드가 다이어터와 유지어터들의 성원에 힘입어 메인디쉬로 신분상승을 하면서 칼로리 깡패 드레싱과 일체화돼 있던 옛 모습도 함께 변했다. 드레싱과 토핑은 개인 취향에 따라 다양한 조합으로 고를 수 있게 됐고, 고급화된 샐러드의 몸값은 점차 올라갔다. 신선한 야채만큼 값싸게 구하기 힘든 것도 없지만 '풀떼기'라는 본질은 만원에 육박하는 한끼 가격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인지부조화를 유발할 지경이었다.
나도 본격적으로 식단에 신경을 쓰기 시작하며 하루에 한 끼 정도는 샐러드로 먹어보자 결심을 했다. 그러자면 토핑은 둘째치고 우선 야채 조달이 문제였다. 일주일치 정도를 한꺼번에 사두면 5일째쯤엔 채소들의 안색이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고, 거기서 몇일 더 지나면 물이 흥건한 야채 쓰레기 비슷한 상태가 돼버리곤 했다. 그렇다고 우리네 어머니들처럼 매일 장을 보기엔 귀찮기도 할뿐더러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양상추 한통, 상추 한묶음 이런 식으로 사면 여전히 며칠뒤엔 흐물거리는 야채 쓰레기로 변해 다 못먹고 버려지는 게 더 많았다. 소량으로 포장된 샐러드용 야채는 이미 구입하는 시점부터 노화가 시작된 상태였다.
이래서 샐러드가 비싸구나 라고 깨달으며 시장의 논리에 굴복하려던 즈음, 스마트팜이란게 눈에 들어 왔다.
스마트팜을 처음 봤을 땐 어쩐지 정이 가지 않았다. 인큐베이터 같은 기계 장치 속에서 인공의 빛으로 키워지는 야채들의 모습이 '농장(farm)'이라기 보다 '실험실'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신선한 야채 조달의 딜레마에 빠진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가정용 스마트팜은 없나?'
있었다. 역시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이런건 없나? 하고 찾아보면 다 있는 세상이다. 보통은 씨앗부터 키우는 종류가 많았는데 이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다 키워서 뜯어 먹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런 낯선 기계를 덜컥 샀다가 제대로 안 쓰게 돼서 처치곤란이 될까봐 걱정도 됐다. 그러나 역시 나보다 먼저 이런 고민을 한 사람이 있었는지, 어느 정수기 회사에서 식물재배기라는 것을 렌탈해주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는 씨앗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자란 모종을 주기적으로 배달해준다고 했다. 게다가 한달 렌탈비는 샐러드용 야채를 사먹는 가격보다도 쌌다.
그래, 바로 이거다! 더 망설일 이유를 못찾은 나는 주문버튼을 눌렀고, 몇일 뒤 식물재배기가 도착했다. 푸릇푸릇한 야채들을 품은 식물재배기가 집 한켠에 자리한 모습은 마치, '미래의 주방은 이런 모습일까'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야채를 키워먹는 삶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