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로 서예 방을 다니는 친구에게서 <입춘축>이 도착했습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는 정도의 까막눈이다 보니 달필인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매 년 잊지 않고 이른 매화꽃이 필 때 즈음에 맞춰 꾸준히 보내옵니다. 디지털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고이 접은 손편지 봉투에 담아 우편으로 보내주는 정성을 헤아려 보면 왕우군(王右軍)의 필체가 부럽지 않습니다.
대한이 지났으니 바야흐로 겨울이 끝나고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다고 봐야겠습니다.
어린 시절 늘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3월이나 4월, 꽃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때가 진짜 봄일 텐데, 왜 하필 추운 겨울바람과 잔설이 여전히 남아있는 2월의 이른 날에 입춘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가르쳐주지 않았던 그 기다림과 여유의 미학을, 나이를 한참이나 먹어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멋들어진 우리 조상님들은 봄의 시작을 계절적인 추위가 없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소한과 대한이라는 최고 추위가 지난 날짜로 잡음으로써 봄은 결국 우리 앞에 닥칠 수밖에 없다는 강렬한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아직도 따뜻한 봄은 아니지만 대한(大寒)日 보다 더한 추위는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봄의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봄이라는 계절에 들어가는 入春이 아니라, 봄에로 향하는 희망을 세우는 立春인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남도에서는 이맘때 벌써 매화꽃이 피기도 합니다. 비단 매화꽃의 개화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추위를 잘 견뎌냈다는 격려와 다짐이 바로 진정한 '입춘'이지요.
우리 인생의 봄도 꽃피는 춘삼월이 아니라, 어쩌면 막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이 인생의 봄날이 시작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의 바닥은 없을 것이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자신감이 움트고, 추락을 잘 견뎌냈다는 자위감이 생긴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봄날의 시작점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