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람개비 Jan 27. 2022

입춘 (立春)

희망을 세우는 입춘축(立春祝)

취미로 서예 방을 다니는 친구에게서 <입춘축>이 도착했습니다.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는 정도의 까막눈이다 보니 달필인지 어떤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매 년 잊지 않고 이른 매화꽃이 필 때 즈음에 맞춰 꾸준히 보내옵니다. 디지털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고이 접은 손편지 봉투에 담아 우편으로 보내주는 정성을 헤아려  보면  왕우군(王右軍)의 필체가 부럽지 않습니다.

대한이 지났으니 바야흐로 겨울이 끝나고 어느새 봄이 성큼 다가왔다고 봐야겠습니다.


어린 시절 늘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가 3월이나 4월, 꽃피고 새들이 지저귀는 때가 진짜 봄일 텐데, 왜 하필 추운 겨울바람과 잔설이 여전히 남아있는 2월의 이른 날에 입춘이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그 기다림과 여유의 미학을, 나이를 한참이나 먹어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멋들어진 우리 조상님들은 봄의 시작을 계절적인 추위가 없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소한과 대한이라는 최고 추위가 지난 날짜로 잡음으로써 봄은 결국 우리 앞에 닥칠 수밖에 없다는 강렬한 희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직도 따뜻한 봄은 아니지만 대한(大寒)日 보다 더한 추위는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봄의 시작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봄이라는 계절에 들어가는 入春이 아니라, 봄에로 향하는 희망을 세우는 立春인 것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남도에서는 이맘때 벌써 매화꽃이 피기도 합니다. 비단 매화꽃의 개화 때문이 아니라 최고의 추위를 잘 견뎌냈다는 격려와 다짐이 바로 진정한 '입춘'이지요.


우리 인생의 봄도 꽃피는 춘삼월이 아니라, 어쩌면 막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이 인생의 봄날이 시작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앞으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의 바닥은 없을 것이고,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자신감이 움트고, 추락을 잘 견뎌냈다는 자위감이 생긴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에서 봄날의 시작점 것입니다.


입춘에 김칫독이 얼어깨진다 하였습니다. 행여 매화, 영춘화 꽃망울이 터졌다고  봄이 왔노라 방심하지는 마십시오.  벚꽃 만발하는 진짜 봄이 올 때까지 골목 귀퉁이의 빙판길을 조심, 또 조심하소서.


요즘 도사와 법사들이 정계에 간섭하면서 부쩍 정치계가 시끄럽습니다. 글자 그대로 "난리굿"이 난 게지요. 수백, 수천만 원을 들이는 굿의 가성비를 입춘축과 비교해보면 답은 명확합니다.

할머니 말씀이 "입춘 시(時)에 붙이는 입춘축 하나가 굿을 8번 하는 것보다 더 발복(發福)에 영험하다"라고 하였으니, 올 해의 입춘 시에 떡하니 입춘축을 붙여야 하겠습니다. 친구의 꾸준함에 비해 보잘것없는 새벽 기상의 수고로움으로  친구의 정성에 보답하여야겠습니다.


2022년, 올 해의 입춘 시는 오전 5시 51분입니다.

이왕지사 준비하신 입춘축이 있으시다면 시간 맞춰 붙이시고  대박의 희망을 맛보십시오.


입춘대길 건양다경 (立春大吉 建陽多慶)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부모천년수 자손만대영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부모는 천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시라.

수여산 부여해 (壽如山 富如海)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이시오.

소지황금출 개문백복래 (掃地黃金出 開門百福來)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이 오시라.

거천재 래백복 (去千災 來百福)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시라.

재종춘설소 복축하운흥 (災從春雪消 福逐夏雲興)

재난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행복은 여름 구름처럼 일어나시라.


작가의 이전글 인생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