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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한결 Jul 27. 2020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아픔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소나기가 내린다.


뜨거운 태양이 얄미워 그늘로 찾아들 무렵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마침 해를 마주하고 늘어진 빗줄기 사이로 무지개도 피었으니 눈이 즐겁다. 무지개 그 너머에 어떤 세상이 있을지 궁금하던 시절. 나에게 그런 시절도 있었음이 새삼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다 문득 무지개다리가 가진 흐린 기억이 떠올랐으니.


열 살 전후의 기억으로, 그때는 여름이면 소를 끌고 산에 간다. 너나 할 것 없이 아침 일찍 소를 산에 풀어놓으면 저녁나절이 되어 찾으러 가도 대부분 아침에 풀어 둔 그 자리에서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인을 기다린다. 농번기에 제 할 일을 마친 일소들에게 이 시절이 가장 평화롭고 여유로운 나날이다.


소는 유순하고 사람을 잘 따른다. 게다가 이동 시에도 한 마리가 앞서가면 나머지는 뒤따라온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 당도하면 누가 이끌지 않아도 자신의 주인을 찾아 성큼성큼 떠나간다. 마을 입구까지만 와도 자신이 속한 그곳으로 스스로 찾아간다.


소몰이 하나만 제대로 해도 고마움에 이웃이나 친척들이 용돈을 가끔 챙겨주신다. 허투루 쓰지 않고 모으면 제법 큰 돈이 되기도 한다. 나는 강아지 두 마리를 사고, 가족들이 모두 식사를 마치면 찬밥과 반찬을 섞어 강아지를 먹인다. 강아지의 풋내가 아직도 기억에 선한데. 아쉽게도 무럭무럭 잘 자라나야 할 여린 생명이 어찌 된 일인지 한 달도 안 돼 시름시름 앓더니 끝내 내 품에서 고개를 떨어뜨린다.


무지개다리를 건너다.


아직도 콩닥콩닥 뛰는 심장의 움직임이 손끝에 선명하다. 힘겹게 뜬 눈이지만 나를 보며 애원하던 눈빛은 여전히 따스하고 애처롭다. 나는 내 품에서 떠나가는 생명의 끝에 매달려 부들부들 뜬다. 하나가 아닌 둘이 그 마지막을 연이었으니 그 충격은 생각보다 오래간다. 떠나가는 존재와 이를 붙든 어린 생명의 간절함이란. 어디에 존재하는지는 모르나 엄연히 생의 경계가 분명한 만큼 눈물로 그 아쉬움을 채울 뿐이다.


삶과 죽음을 구분하는, 이처럼 고운 단어는 또 없다. 무지개다리는 무지개와 다리가 합쳐진 고운 단어임에도 슬픔을 잔뜩 머금고 있다. 죽음에 대해, 누군가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해 쉽게 인정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이 말을 듣는다면 누군가 내 곁에서 떠나감을 예고한 말이기에 피하던 말이기도 하다.


가슴에 묻는다.


나는 어머니의 눈물을 기억한다. 나와 작은형님 위로 각각 한 분의 형님이 더 계신다는 것과 이 형님들은 다섯을 전후해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도 함께. 가난이 죄가 되어 병원 한 번 제대로 못 가보고, 약도 제대로 먹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도록 가슴에 돌처럼 얹혀 누르고 또 누르던 고통. 차마 아프다는 말조차 입 밖에 내기 어려워 혼자 감내해야 했을 어머니의 긴 시간을 기억한다. 무탈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나와 형제 이면에 먼저 간 아이들의 명복을 빌어야 했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막연하게 생각되던 고통이 이제야 실제로 느껴지다니.


삽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싸늘하게 식은 자식을 어깨에 걸치고 산을 올랐을 아버지의 마음을 그 누가 알까? 맑은 정신으로는 감당이 안 돼 소주 한 됫박을 걸치고서야 산에서 내려오신 아버지와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두 손 모아 지켜보신 어머니. 나는 지금에서야 그때의 통증을 오롯이 내 몸으로 받아들인다. 이 또한 시간이 남겨준 쓰라린 기억이므로.


아픔에는 시차가 존재한다.


나는 이 사실로 또 한 번의 몸살을 앓을지도 모른다. 그림처럼 눈앞에 선명하도록, 영원히 기억에 머물도록 세밀하게 그려내지 못해서. 누가 봐도 잘 썼다 할 정도로 제대로 써 내지 못하는 풋내기라서 더 아프다. 그래도 다행이다. 아버지께서 거나하게 취하신 날은 어머니와 형제들이 긴장했던 날이지만 그 이면에는 아버지의 아픔 또한 컸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그렇지 못했다면 두고두고 원망하고 아쉬워했을 테니. 


맑은 날 내리는 소나기가 무지개를 품는다. 소나기라는 존재는 반가우면서 한편으론 당혹스럽다. 우산도 챙겨오지 않아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한둘이 아니다. 재빠르게 피한다 싶었는데 어깨 너머가 흠씬 젖어있다. 하늘엔 여전히 해가 짱짱한데 눈부시게 내리는 소나기는 부자연스러움을 연출한다. 슬픔과 기쁨이 당혹스럽게 교차하던 날의 기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가 보다 하면서.


사람은 누구나 고통에 대한 경험치가 있다. 그때는 이해되지 못했던 타인의 아픔이 지금은 누구보다 깊고 넓게 공감이 되는 순간이 온다. 강아지처럼 작은 생명의 꺼짐, 그때는 그게 큰 슬픔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된 부모님의 고통과 견줄 수 있으랴? 가슴에 묻은 자식은 생을 오롯이 흔들고 남은 삶을 온전한 정신으로 버티지 못할 큰 이별의 경험을 안겨준다. 나는 이렇게나마 내 부모님의 아픔을 녹여드린다. 열심히 살다 떠나셨고, 누구보다 위로가 필요하셨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또한 수많은 위기의 순간으로부터 나를 지켜내신 고마움을 두고두고 감사하다 말한다.



Written By The 한결.

2020.07.27 대한민국 대구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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