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의 '미니어처 양주'

#미니어처 양주 #아빠

by 지금이대로 쩡

강남에서 논현역 걸어가는 길에 발견한 ‘세계 양주 백화점’.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나 보다. 없어지는 추세이니 신규 오픈한 곳은 아닌 듯.


대학 시절,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시골에서 갓 올라 온 내게 ‘서울 가정집’ 방문은 큰 의미였다. 혼자 사는 막내 언니 자취방에 얹혀살았기 때문에 늘 동경했다. 친구 집은 입구부터 다르게 느껴졌다. 잘 정돈된 아빠의 구두, 남동생 운동화(남동생이 워너비였던 시절이었다.), 깔끔한 싱크대 ‘서울 엄마’ 손길, 부모님 방에 있는 침대, 거실의 피아노, 식탁에 놓여있는 과일. TV에서만 보던 ‘화목한 가정’의 모습. 후훗.


집 구경 중 친구 아빠의 취미라는 미니어처 양주를 보게 되었다. 해외여행 때마다 한 두 개씩 사 오신다는 취미. 장식장 속 가득 진열될 만큼 꽤 많았다. 일부는 한국에 팔지 않는다는 친구의 자랑에 더욱더 매료됐다.


한편으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우리 아빠에게 술이란 발견 즉시 마시는 것이었다. 꽤 오래 아프셨는데 술로 많은 고통을 달래던 분이셨다. 내가 아는 한, 세상의 모든 아빠는 소주와 막걸리를 좋아했다. 한데 양주라니??? 심지어 술을 취미로 모은다고? 마시지 않고?? 앙증맞은 병에 감탄하는 척했지만 사실 취미 자체에 감탄하고 있었다. 나도 저런 취미를 가지고 싶다. 아니 실은 저런 취미를 가진 아빠를 동경했던 것이겠지. 마시지 않고 보는 술, 귀엽고 앙증맞은 미니어처 양주병을 모을 수 있는 아빠.


돈을 벌게 된 후 미니어처 양주에 애정을 쏟았다. 첫 직장에서 받은 급여 월 92만 원. 세금 떼고 받은 급여 80여만 원. 용돈 10만 원을 빼고 큰언니 통장으로 입금. (나에게 너무 큰돈이라 큰언니에게 돈 관리를 부탁(!)했다.)


학생 때와 비교하면 월 10만 원이 큰돈이지만 직장인 용돈으로 가히 많은 금액은 아니었다.

용돈 10% 이상을 미니어처 양주 사는데 소비했다. 아빠한테 뺏길 염려 없는, 아직 20대였던 막내 언니가 몰래 마셔 없어질 염려 없는, 나의 취미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일단 '꼬냑'

‘다음 달 꼬냑 한 병!’,‘다음 달 1만 원이 넘는 비싼 거!’, 하는 다짐으로 급여날을 기다렸다. 퇴근길 ‘세계 양주 백화점’을 들러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었다. 사장님이 나를 귀여운 표정으로 본 기억이 난다. 그것도 단골이라고 가끔 싸구려 양주를 그냥 주기도 했다.


첫 직장을 다닌 지 1년 즈음, 회사가 폐업했다. 마지막 급여는 받지 못한 체 졸지에 백수가 됐다. ‘세계 양주 백화점’ 사장님께 백수 탈출하면 다시 오겠다는 인사를 뒤로 한 채. 다음 직장은 월 65만 원. 인턴 3개월이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 직장은 75만 원. 또 인턴 6개월이 필요하다고 했다. 큰언니의 철저한 돈 관리 속에 내 용돈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벤처 붐이 일어나던 시기라 모든 회사가 불안전했다. 인턴이라는 타이틀로 급여 적게 주는 게 관행 아닌 관행이었다. 그리고 1년도 안되어 폐업.


그렇게 취미 생활은 점점 멀어져 갔다. 꼬냑 한 병을 못 사고. (꼬냑이 15,000원 거금이었다.)


얼마 후 큰언니 집에 살게 되었다. 막내언니랑 다투고 집을 나왔는데 옷은 덜 챙겨도 미니어처 양주는 모두 챙겨 나왔다. 참 대단한 애정이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집에 들어와 보니 큰 형부가 “편의점에서 하나 사줄게.”라는 미소와 함께 미니어처 양주 몇 개를 마셨다 고백했다. 울 뻔했다. 아니 마음속으로 이미 울었다. 그 후로도 자꾸만 탐을 내는 형부를 보며 ‘내가 어떻게 모은 건데’ 하는 마음 반, ‘저걸 두면 다시 모으고 싶을 테니 내려놓을까’ 하는 마음 반.


결국 수입이 적었던 나의 선택은 ‘내려놓기’였다.

비싼 양주는 아니었지만 추억이 담긴 나의 사랑 미니어처 양주는 형부 입으로 사라졌다. 아빠한테 뺏길 염려 없어서 좋았던 미니어처 양주를 형부에게 뺏길 줄이야.


우리 집 김치 냉장고 위에 놓인 미니어처 양주 두병.
20년을 함께 한 나의 미니어쳐 양주

20년 세월을 함께 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사수한 두병은...그냥 미니어처 양주가 아니다.


시골 학생의 문화적 충격, 직장인이 된 후 가진 첫 취미, 사회 초년생의 용돈 쪼개기... 그리고 가지고 싶었던 이상형의 아빠... 일지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좋은 동네였다. 안녕! 우리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