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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이대로 쩡 Sep 01. 2019

행동으로 자신을 존중할 줄 알았던 베르트

루거총을 든 할머니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브누아 필리퐁>이라는 프랑스 작가의 소설이다. 책을 받아 들었을 때 표지 속 까만 고양이와 할머니의 단호한 표정이 예사롭지 않은 스토리가 전개되겠다 싶은 예감이 들었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 소설이다.

나를 위협하지 말 것, 그리고 존중할 것.

102세의 할머니가 무슨 일로 루거총을 들고 단호하게 자신을 위협하지 말라, 존중하라 말하고 있었을까.


평범한 여성의 삶을 살지 못했던 주인공 베르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괴물이 되어야 했다. 작가는 호러 서스펜스를 블랙 코미디로 만드는 능력을 가졌다. 괴물(그 시대의 남자는 대부분 괴물이었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서슴없이 그들을 직접 단죄한 베르트의 살인이 통쾌하기까지 한 것은 역시 작가의 능력이다. 유쾌하게 읽다가 노골적인 묘사가 등장할 때면 경악하게 되지만 소설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4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단숨에 읽었다.


액세서리에 불과했던 여자가 겨우 투표권을 얻게 된 시대, 전쟁 속에서 나치의 악랄함을 겪어야 했던 시대를 살았던 베르트가 102세가 되어 지난 살인을 고백하는 이야기다. 폭력 남편을 연인과 함께 살해 후 도망자 신세가 된 남녀를 집안에 들여 음식을 제공하고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준다. 심지어 옆집에 사는, 죽이고 싶었으나 필요에 의해 죽이지 않았던 자의 차까지 제공(?)하는 배려심 많은 할머니가 된다. 동병상련의 마음이었을까? 죽음을 코앞에 둔 마지막 인정이었을까. 나치에게서 빼앗은 루 거총과 할머니 나나가 물려준 장총으로 마치 마지막 힘을 써대듯 마구 쏘아댄다. 그 틈을 타 연인들은 베르트의 경제적 도움까지 받아 도망칠 수 있었다. 경찰이 출동하자 집시가 자신의 차를 훔치려 했다는 거짓 증언으로 자신의 정당방위를 해명하려 한다.

독설가에 페미니스트인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102세 할머니 집의 단순 절도 사건이라고 생각했던 벤투라 수사반장은 베르트의 집 지하실에 묻혀있던 사람과 동물의 뼈 무덤 사진을 전송받고 경악한다. 능청을 떨며 모르쇠로 일관하던 베르트도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털어놓고 떠날 준비를 하듯 지난 연쇄 살인, 어쩌면 그녀만의 삶의 방식일 뿐 살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일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블랙위도우. 함께 산 남편은 모두 죽어 나감으로 얻어진 베르트의 별명이다. 살인에 대한 자백을 듣던 벤투라 수사반장은 법으로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살인의 이유와 상황을 들으며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다. 심지어 살인자인 베르트에게 묘한 매력을 느낀다. 그것은 비단 벤투라 수사반 장만은 아니리라. 살인은 용서될 수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통쾌한, 아니 너무 유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닐 테니 말이다.


베르트의 엄마는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그녀를 떠났고 평생 함께 살았던 할머니 나나는 반대하던 결혼 생활이 조각나고 다시 만난 남편과도 행복하지 못한 베르트를 두고 떠났다. 베르트를 두고 떠나며 나나가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더 이상... 침묵하지 말라고
그 인물 말고, 너 자신한테 얘기하라고! 네 얘길 들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라는 나나의 마지막 유언이 베르트의 삶이 평탄하지 않음을, 그것을 헤쳐나가길 바라는 마지막 바람이었다. 그래서 베르트는 계속해서 행동했다. 물론 방법이 옳지는 않았으나 태어난 동네를 벗어난 적 없고 속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조차 가르쳐 주는 이가 없이 자란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방법이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배운 적 없고, 자신을 지켜준 적 없는 법과 도덕이 할머니가 말한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블랙위도우는 어쩌면 베르트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생 단 하나의 사랑 루터마저 그녀를 떠나고 만다. 전쟁이 끝날 무렵 우연히 마주친 미군 유부남 루터는 사랑을 남기고 자신의 삶으로 떠났다. 그리고 15년 만에 그녀에게 돌아왔다. 자신의 모든 살인을 고백했음에도 폭력적이지도, 자신을 액세서리 취급하지 않고 존중해 준 루터와의 행복. 그것은 베르트의 삶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살인당한 루터의 죽음을 갚기 위해 세 명을 한꺼번에 처단해야 했으니 그녀의 삶은 언제나 누군가를 단죄하는 삶이었다.

지하실에 묻어둔 7구의 시체와 동물뼈가 끝이 아니었음을 안 벤투라 수사반장은 사랑하는 루터의 복수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역시 살인의 정당성은 인정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가슴에서는 다른 목소리를 내며 혼란을 겪는다.


루터를 자살로 위장한 세 명은 시멘트 안에 갇혀 숨도 쉬지 못하게 버려둔 베르트의 복수가 살갗이 바짝 설만큼 잔인함에도 여전히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통쾌했다.


어린 시절, 동물을 괴롭히던 동네 남자아이들을 혼내주고, 나치가 오빠를 사살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여자아이를 데려와 안아주던 베르트다. 정당한 일은 아니지만 여자로서 삶을 다시 살 수 있게 도와주려 어둠의 손길로 젊은 여자아이들의 수술을 해주었다. 베르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을 뿐, 누군가를 죽이며 희열을 느끼는 살인자는 아니었다.


자신의 살인을 모두 고백한 베르트는 벤트라 수사반장을 속여, 혹은 벤투라가 속임을 당해 주어 집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끝까지 자신을 위해 행동한 베르트는 역시 스스로를 존중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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