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의 끝자락 영도에서 태어났다. 남들에게 부산은 열정과 낭만의 도시 일지 모르나, 어릴 적 내 기억에는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삶의 현장이었다.
내 친구 덕자는 가파른 계단 아래에 살았는데 판자와 슬라브로 얼기설기 실내 공간을 겨우 만든 집에 살았다. 마당이 너무 공개되어 있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계단 위로 지나갈 때면 덕자가 쭈그리고 앉아 쌀을 씻거나 동생을 씻기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는데 덕자는 늘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 살았던 나는, 쌀 한되 팔아오라는 심부름을 잊고 계단에 걸쳐 앉아서 덕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주 혼이 났었다.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러 가기 전 자갈치 시장이나 국제 시장에 들러 물건을 샀다. 선원복이며 생필품 등을 잔뜩 사야 했는데 부모님은 드센 자갈치 상인들과 흥정하고 서로 거친 말로 기싸움을 하며 손해 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용할 물건과 짐을 엄마와 나는 두 손 가득히 끙끙 끌어안고 실어 나르며 아버지가 돈 많이 벌어 내년은 잘 살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IMF 사태 때 아버지가 실직하면서 엄마는 드센 자갈치 아지매가 되었다. 새벽에서 밤늦게까지 생선을 고르고 다듬으며 생존 투사가 되었고 억척이로 변해갔다. 옆집, 앞집 아저씨들의 실직이 잇따르자 동네 아줌마들은 엄청난 단결심을 보여주었다. 삼삼오오 서로를 챙기며 일터를 소개해주고 억척이 그룹이 되어 함께 시대를 버텨 나갔다. 파마에서부터 눈썹 문신까지 그들은 미용 단체 할인 멤버이기도 했기에 때때로는 우리 엄마인지 덕자 엄마인지 헷갈릴 때도 많았다.
나는 24년을 부산에서 살았고 24년을 경기도에 살았다. 나는 낯선 공간을 두려워하는 인간이다. 경기도로 오고 나서 지금 사는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다. 이런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강한 정착민 성향 때문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노마드(유목민)의 삶이 두려운지도 모른다.
10년 전 부산 영도가 재개발이 되면서 부모님도 모두 인천으로 동생네 근처로 이사 왔다. 웬만하면 분양권을 받아 살고 싶었지만, 감당하기 어려운 추가분담금을 내면서 언제 완공될지도 모를 까마득한 기간을 견딜 수 없다 하셨다. ‘형님, 동생’으로 지내던 억척 아지매들도 다 흩어지고 자식 따라, 형편 따라 헤어짐을 받아들이며 힘겹게 터전을 정리하셨다.
결혼 20주년을 기념하며 남편과 함께 부산여행을 가기로 했다. 결혼식도 하고 신혼 첫날밤을 보냈던 그곳! 부산으로 다시 가보자고 말이다.
우리 집 터는 깨끗이 사라졌다. 개발로 인해 웅장하고 멋진 아파트가 들어선 내 살던 곳은 더 이상 고향이 아니었다. 신도시가 되어 낯선 공간으로 마주한 그곳. 친구들과 술래잡기하고, 계단 아래 덕자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옆집 아저씨가 술주정을 하며 드러누웠던 골목길은 감쪽같이 사라졌고 없어졌다. 이제 이곳엔 낯선 이들만 살고 있다.
현대 예술을 창도 했던 보들레르 같은 사람은 이 새로 정비된 도시에서 삶의 폐허를 보았다. 그는 '삶이 살고, 삶이 꿈꾸고, 삶이 고통을 견디던' 그 어둡고 뱀처럼 구불구불한 골목길이 광장으로 바뀐 자리에서 제 삶의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제 땅에서 망명객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밝고 깨끗하고 번쩍거리는 폐허에서는 어떤 감동스러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 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