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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기 Jun 07. 2024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읽고

선생님은 어떻게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함께 출장에 동반한 선생님이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호기심을 보인다. 나도 모르게 기다리기라도 한 듯 가족사에서부터 출발하여 내 안의 분노, 슬픔의 인생사를 이야기하며 필연적으로 글쓰기로 이어질 수 없었던 운명을 쏟아낸다.
말하고 나니 정적이 흐른다.
아뿔싸!
아마도 그이는 이런 답을 기대하고 물었던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항상 자주 반복되는 실수.
‘나 이렇게 살았다고! 나 이런 사람이라고!’
타인이 인정해주기를 원하고 그것에 항상 목말라하는 내 모습이 상대방의 호기심을 발판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달려 나와 저지할 새도 없이 속도를 냈는데 침묵 반응에 창피함을 느끼고 숨어버렸다. 침묵을 유지한 채 목적지까지 도착하며 함께 되돌아갈 걱정을 하며 ‘차라리 혼자 올 걸’ 후회를 한다.
나의 일상에서 이런 일들이 종종 있다. 이야기를 끝내놓고 관계가 깊어지기보다는 부끄럽거나 서운해져서 소원해 지는 것 같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혼자 뭔가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홀로 있음을 택하면 마음이 편안할진 몰라도 관계와 단절되는 불편한 상황이 또 두렵고 조바심난다.
 
인문학 공부를 하며 달라진 점은 빨리 알아차린다는 점일 것이다. 타고난 성향이랄까 성격이랄까 이것은 변화가 불가능하기에 비슷한 상황에서 문제 행동을 하지만, 요즘은 전보다는 일찍 알아채고 멈춤과 돌아보기를 한다. 아마도 인생이 이런 건가 보다. 내가 원하는 멋진 이상적인 인간으로 ‘짠’하고 바뀌는 것이 아니라 아주 지지부진하게 타고난 ‘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과정인가 싶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주변의 권유로 읽었다. 외로움을 호소하며 관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니 추천해 주었다. 이 소설은 고독을 선택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고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개인의 섬세하고 절절한 마음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다. 왜 나에게 추천했는지를 새기며 읽었지만 아둔한 탓에 단박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 번 읽고 밑줄 긋고 의미를 되새기며 정성스럽게 읽지만 마음에 깊게 이해되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고독’이라는 실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두려워만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1.메이지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
소설 <마음>의 시대적 상황은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이다. 일본의 근대산업 발전과 ‘문명개화’가 이루어진 시기로 그 이전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자주 되는 메이지 천황은 한 시대를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이며 천황의 서거는 당시 사람들에게 엄청난 사건임을 해석할 수 있다.
 
“메이지의 정신이 천황으로 시작되어 천황으로 끝났다는 생각이 들더군. 메이지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은 우리가 그 후에 살아남는 건 결국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는 느낌이 강렬하게 내 가슴을 쳤네. ”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생기발랄한 대학생이며, 친구의 초청으로 방학 동안 잠시 들른 가마쿠라 해수욕장에서 중년의 남성을 만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서양인 곁에 서 있던 일본인 남성. 첫 만남은 그러했다. 이후로 바닷가에서 홀로 수영을 하며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 조용한 그 사람을 보며 호기심을 갖게 되고 그와 어울리며 선생님이라 부르기로 한다. ‘나’의 질문이나 배려에 친절하지도 않고 늘 냉소적인 반응을 보여 서운하게 해서 불만스럽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선생님을 따르고 가까이하고 싶다. ‘나’는 선생님과 지내며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친밀한 사이가 되고 싶지만 선생님은 처음 만났을 때나 친해졌을 때나 태도에 차이가 없다. 선생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나’의 마음을 아는 것 같지만, 고향을 떠나 홀로 도쿄에서 생활하는 외로움 때문에 자신에 팔을 뻗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마음>은 총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선생님과 나, 2부는 부모님과 나 그리고 3부는 선생님과 유서이다. 즉, 1, 2부에서는 ‘나’의 입장에서 선생님, 부모님과의 일화를 바탕으로 느낀 마음을 서술하였고 3부에서는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자신의 이야기를 유서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놓고 있다. 소설에서는 부모님, 선생님 그리고 그와 연관된 인간관계를 묘사하며 말과 행동을 통해 섬세하게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나’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아버지와 선생님을 상세하게 관찰하며 서술하면서 두 사람을 종종 비교한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와 선생님을 비교했다. 둘 다 세상에서 보면 살아 있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조용한 사람들이었다. 남에게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보면 두 사람 다 빵점이었다.”
 
 
선생님과 아버지는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으로서 근대사회라 일컬어지는 변화의 큰 물결 안에서 살았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원하던 그렇지 않던 세상은 근대 문명 사회 속에 ‘개인’으로 살아야 하는 최초의 일본 세대이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지만 ‘나’에게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자식을 도시로 대학공부를 보내며 그곳에서 직장을 잡고 번듯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는 영락없는 조용하고 우직한 시골 촌부의 모습이다. 아들의 대학 졸업장을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열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거나 자식의 학자금을 대주면서 늘 잔소리를 하는 아버지는 세상 물정에 어둡다. 그래서 아버지는 ‘나’의 내면을 채우기에 어딘가 부족한 존재였다. 아버지나 선생님이나 쓸쓸하게 보이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높은 학력과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일체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은둔생활로 세상에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선생님을 ‘나’는 신비롭게 바라본다. 식견이 높은 선생님이 혼자를 고수하며 많은 것을 말하지도 세상에 나가지도 않는 점을 대단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내면에서 선생님을 힘과 생명을 가진 존재로 보고 그와 인연이 끊어지는 것을 매우 고통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경고하며 선을 긋는다.
 
“나는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하네. 말하자면 자신을 믿지 못하니까 남들도 믿을 수 없게 된 거지. 자신을 저주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거네.”
 
“아무튼 날 너무 믿으면 안 되네.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속은 앙갚음으로 잔혹한 복수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 이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지.”
 
그러나 형의 평가는 다르다. 능력 있는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낭비하며 사는 것은 지독한 에고이스트라고 비난한다. 아마도 형의 시각은 일반적인 우리의 태도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태도가 강한 형의 눈에는 선생님이 그렇게 보일 수 밖에 없으니까.
 
2. 일상화 된 고독
소설 속에 나온 사람들의 관계는 모두가 외롭다.
자식들이 부모를 돌봐 주며 곁에 있기를 바라면서도 먼 도시에서 좋은 직장을 구해 살기를 바라고
고향을 떠나 홀로 타향생활을 견디며 대학공부를 마치고 직장을 구해 살길을 마련해야 하지만 녹록치 않고
사랑의 믿음은 있지만 깊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남편을 바라보아야 하기에 쓸쓸하고
세상의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자신조차도 그러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괴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 속 등장 인물들 중 그 누구도 자신들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거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문득 어느 순간 깊게 한숨을 쉬다가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외면하며 혹은 잊어 버리려 하는 행동이 습관이 되어 익숙하게 지낸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메이지 천황의 서거를 두고 노기 대장의 죽음을 접하면서 아버지의 병환은 더 깊어졌고, 선생님 또한 오래전부터 결심한 자살을 실행한다.
 
“ 나는 신문에서 노기 대장이 죽기 전에 남긴 글을 읽었네. 노기 씨는 세이난 전쟁 때 적에게 깃발을 빼앗긴 이래 사죄하기 위해 죽자, 죽자 하면서도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의미의 구절을 보았을 때.....
(중략)
노기 씨는 그 35년간 죽자, 죽자 하면서 죽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야.
(중략)
나는 결국 자살하기로 결심했네. 내가 노기씨가 죽은 이유를 잘 알 수 없는 것처럼 자네도 내가 자살하는 이유가 명확히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시대의 변화에서 오는 사람의 차이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어쩌면 개인이 갖고 태어난 성격의 차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몰라. ”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세대가 짊어진 새로운 사회에서의 외로움과 고독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천황과 노기 대장의 죽음에 묻어가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특히나 선생님은 사랑하는 아내가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또한 자신의 고독을 영원히 벗어날 방법으로 새로운 시대의 구시대적인 방법(일본의 사무라이 자살 문화)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자살을 앞두고 유서를 통해 순진하면서 믿을만한 존재가 된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나’의 가슴에 새로운 생명이 깃들기를 바라는 희망의 마음을 밝히면서 말이다.
 
3. 자아가 던진 덫.
유서에서 밝힌 선생님이 세상을 믿지 못하게 된 첫 번째 이유는 숙부 때문이었다. 부모님이 장티푸스로 사망하면서 숙부가 도맡아 일을 처리했으며 많은 재산 또한 그러했다. 따뜻하게 자신을 대해 준 숙부를 믿었던 선생님은 도시로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 재산이 빼돌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숙부가 자신을 속였다는 걸 깨달음과 동시에 다른 사람도 반드시 자신을 속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 이외에 다른 사람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또한 지금의 아내를 동시에 좋아했던 절친한 친구 K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교묘한 행동으로 자살까지 이르게 한 자신을 보면서 선생님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되었고, 이는 결국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죽음을 택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아내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해 죽은 듯이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죽었다 하고 살아가려고 결심한 내 마음은 때때로 외계의 자극에 펄쩍 뛰어 올랐지. 하지만 내가 어떤 방면으로 나아가려고 생각하자마자 어딘가에서 엄청난 힘이 나와서 내 마음을 꽉 쥐고 전혀 움직일 수 없게 하네. 그리고 그 힘이 나에게 너는 뭔가를 할 자격이 없는 놈이라며 억누르듯이 말하지. 그러면 나는 그 한마디에 위축되고 마네. 얼마쯤 지나 다시 일어나려고 하면 다시 단단히 죄어오지. 나는 이를 악물고 왜 남을 방해하는 거냐고 호통을 친다네. 불가사의한 힘은 차가운 목소리로 웃지. 네가 잘 알 텐데, 하는 거야. 나는 다시 축 늘어지고 마네.
 
 
선생님은 숙부와의 갈등을 통해 스스로 고귀한 잣대를 세우며, 살아가려 했으나 친구 K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세운 잣대에 걸맞지 않은 자신을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러한 과정을 솔직하고 섬세하게 자신의 과오를 고백해 나가며 세상이 모르는 ‘진실’을 ‘나’에게 털어놓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선생님은 내면의 자아의 덫에 잡혀 불쑥 튀어 오르는 내면의 힘조차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고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선생님은 왜 맞서지 않았을까.
배신과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과대해진 자아가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은 그가 겪고 있는 우울과 고독이 당시로서는 낯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의 유서를 통해 ‘나’에게 자신의 그 마음들을 속속들이 보여주며 자아의 덫에 빠지지 말기를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기를 후 세대에게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작가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선생님을 통해 자신의 고독을 이야기하며 섬세하게 표현하는 글로 생명력을 얻고 극복하고 있다고 말이다.
 
나에게 글쓰기가 없었다면 아마도 소설 속 선생님 못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나의 괴로움을 모른 채 주변을 책망하고 또는 나 자신을 비하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방학 동안 그간에 쓴 글들을 훑어보았다. 상황과 만난 사람들은 달랐어도 고민하고 속상해하는 부분은 거의 동일 하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노력이 소용없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고, 늘 잊어버리고 환영받지 못한 기억들을 원천으로 글을 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를 죄어오는 자아의 덫에 빠지지 않으려고 내면의 힘이 더욱더 에너지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 대견했다.
 
“선생님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어요?
라고 누가 질문을 한다면 나는 또 많은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를 잘 전달하는  데 집중하며 침묵을 두려워하여 숨어버리고자 하는 자아와 맞서 온전한 마음을 지켜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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