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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저 Sep 07. 2022

선생님 저 집에 가고 싶어요

뉴스레터 <막차> 4호 백업

대학원에 입학한 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잦아진 일이다. 이 호칭을 공식적으로 처음 부여(?)받았던 것이 대학원 면접이었다. 조교 선생님이 내 이름 뒤에 붙이는 ‘이이저 선생님’이 너무 어색해 당황스럽고 복잡한 심경이었던 기억이 난다.(아시아4년제종합대학의문과대를6년만에겨우졸업하고6개국어는커녕한국어도겨우구사하는내가... 선생님?) 막 학부를 졸업한 나부랭이에게 선생님이라니. 아직 석사도 따지 않았는데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머지 않아 선생님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 호칭이 익숙하다 못해 거의 남발하곤 하는데, 특히나 대학원생들끼리는 누구누구쌤이라고 부르는 일은 기본 원칙에 가깝다. 함께 공부하는 처지에 “~씨"는 정 없어 보이고, “~님"은 회사 동료같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학문하러 온 다양한 세계의 사람들에게 장유유서의 유교적 논리를 일삼으며 쉽게 언니오빠동생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결국 자연스럽게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퉁쳐(!) 부르기로 한 것이다.


한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불리다 보니 나는 언제쯤 진짜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여기서 ‘진짜' 선생님은 학문적 명예를 성취한 선생님이다. 공식적으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것이다. 석사를 따고 박사과정을 밟으며 학교 강의에 나가면? 언젠가 교수로 임용이 된다면? 책을 쓰거나 강연에 나간다면? 세 가지 가정 모두 선생님이 되는 길이기는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이런 버러지같은 학문적 지식으로 선생님이 되기는 글렀다. (그냥 하는 말이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한편 어원적으로는 먼저 삶을 산 사람들을 선생이라고 칭한다. 먼저 삶을 살아간다는 것. 이 말을 가만 생각해보자. 우리 개개인의 삶은 남들과 한 순간도 같은 것이 없다. 다시 말해 누구의 삶이든 타인보다 먼저 경험하거나 늦게 경험하는 것이 수없이 많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삶을 궁금해 하고 동경하기도 하고(때로는 동정하기도 하고), 그 사람을 지표로 삼아 경로를 설정해보기도 한다.


단지 앞서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지혜를 구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건 사소한 배움에 관한 것이다. 다시 술자리로 돌아와서, 우리는 대학원에 일찍 진학한 버드와 이저에게 대학원 생활이 얼마나 팍팍한지(그런거 치곤 위기감이 많이 없는 편.) 물어볼 수 있다. 재미는 없겠지만 미학과에서는 무엇을 공부하는지 알려줄 수도 있다(feat. 그거 진중권방시혁아니야?). 버드에게 나는 가보지 못했던 영국의 환경이 어땠는지 들어볼 수도 있고, 나는 작금의 케이팝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일장토론을 열 수도 있는 일(이제 강의 커리큘럼도 읊어줄 수 있음.)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리적 나이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 없이 서로의 선생님이 될 수 있고, 나의 삶은 당신이 알 수 없는 시공간에 둘러싸여 있으며, 그것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야기 뿐이다. 그러나 부담은 갖지 말자. 중요한 것은 삶이 강의라는 얘기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어떤 삶의 존중이니까. (안그래도 이것도 저것도 알아야만 한다고 권유하는 사회에서 무언가를 진지하게 배운다는 건 부담이다!) 그러니 이제 누군가 모임의 강단에 서면 아이고 선생님, 오셨어요.(선생님 첫사랑 얘기 해주세요...) 하고 반갑게 빈 잔을 채워주도록 하자.


2022.05.11




뉴스레터 <막차>는 술을 사랑하는(사랑했던!)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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