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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저 Sep 08. 2022

영원한 습관이라는건 없어

뉴스레터 <막차> 5호 백업


Q. 다음 지문을 읽고, 이저의 실제 습관과 일치하는 것에 모두 표시하시오.




늦은 아침의 햇살이 어렴풋이 창가를 밝힌다. 전날 과제를 새벽까지 하고 잠든 탓인지 눈 한번 제대로 뜨는 게 어쩐지 정말 힘든 일이다. 찌뿌둥한 팔로 알람이 울리는 휴대폰을 들어 밤새 놓친 알림들을 확인한다. 밀린 답장과 SNS의 새 소식 그리고 오늘의 이슈와 여타 다른 정보들을 체크한 뒤 계속 누워 있다 침대에서 일어난다. 아침은 귀찮으니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먹기로 한다. 시리얼을 적당한 속도로 씹으며 어제 보다만 유투브 영상을 심드렁하게 다시 재생한다.


한참 영상을 보다 생각해보니 버드와의 술약속을 가려면 2시간이 남았다. 음악을 틀고 샤워를 하면서 이를 닦고,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나와서는 바디로션을 바른다. 옷을 갈아 입고 머리를 말린 뒤 가방에 지갑과 아이패드를 챙긴다. 여유있게 준비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아차차, 지하철을 타려고 보니 제일 중요한 에어팟을 챙기는 일을 깜빡한 일이다. 이저는 플랫폼에서 대가리만 벅벅 긁다 음악을 듣는 대신 소리를 끄고 넷플릭스에 자막을 켜고 보기로 한다.


버드를 만나 한참 메뉴를 고르다 분위기가 아늑한 술집을 찾는다. 하이볼? 생맥주? 고민을 하던 이저는 역시 첫잔은 시원하게 생맥주지!를 외치며 맥주를 주문한다. 주문한 안주가 전부 나오기도 전에 이저는 첫잔을 쭉 들이켠다. 뜨끈한 탕안주가 나올 때쯤엔 이미 맥주는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 한번 달려보자고. 선언한 버드와 이저는 그때부터 빠르게 소맥을 말기 시작한다. 정신차려보니 시간은 2시간이 지나있고, 테이블에는 서너병의 술병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아 술 좀 그만 마셔야되는데. 중얼거리다 피곤한 눈을 깨우며 택시를 잡는다.






***






자, 과연 몇 개가 정답일까? (나를 아는 사람들은 꽤 많이 맞췄을지도?) 정답을 정확히 말하자면, 2022년 5월 기준 5개이다. 일어나서 알림 확인하기, 바디로션 바르기, 에어팟 챙기기, 자막켜고 넷플릭스 보기, 술 그만 마셔야 한다고 한탄하기. (나머지에 대한 해설은 언젠가 이저를 만나면 알 수 있다.)


과거에는 이저는 술을 급하게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스무살의 나는 걱정 많은 엄마가 있었고(지금도 여전하시지만), 믿기지 않겠지만 통금이 10시였다. 그러니 술을 사랑하는 그녀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제한 시간 안에 가장 빨리 많이 술을 마시는 것! 그때는 마실 수 있을 때까지 진탕 소주를 퍼마시고 알콜 냄새 가득한 드래곤 콧김을 내뿜으며 멀쩡한 척 세수를 하고 눕는게 일상이었다.


그래, 그땐 그게 됐었다. 이후 수년이 지나 한참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기, 친구와 둘이서 와인 네 병을 진탕 마시고 집에 들어가던 날. 나는 밤새 민달팽이 저주에 걸린 론 위즐리처럼 변기를 끌어안고 토를 했고(식사 중이었다면 죄송할 따름이다.) 다음날 관에 막 누운 시체처럼 누워 있어야 했다. 머리는 또 어찌나 아프던지. 최악의 술병은 이것말고도 많기야 하지만, 슬프게도 어떤 시점부터 ‘술 빨리 마시기’ 습관은 천천히 마시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습관이라 해서 천년만년 지속되는 것은 아니니까. 글을 쓰며 생각하다 보니 내 습관들에 시간의 풍파가 묻어있음을 발견했다. 나에게는 사라지는 습관, 변화하는 습관, 생성하는 습관이 있다(이상하게도 자동사적 표현이 더 마음에 든다). 예를 들어 음악을 틀고 샤워하는 일은 사라진 습관이고(그러나 내키면 다시 생성될 수도 있다), 새벽을 지새우며 과제를 하는 것은 그러지 않는 쪽으로 변화하는 습관(이젠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번씩 <막차>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은 생성하는 습관(아직은 마감이 익숙하지 않다)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세 습관도 어떤 방향으로 변해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매일 에세이를 쓰게 될 수도 있고, 술을 끊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사실 요즘 절주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버드가 무척 섭섭해 했지만.) 습관이 시간에 의해 풍화된다니, 너무나 철학적이며 웃긴일 아닌가. 달리 말하면 습관이라 부르는 삶의 일부분이 계속해서 생동감 있게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습관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는 체력도 정신력도 시간과 함께 풍화되어 가고 있지만...


자, 그럼 오늘 하루의 습관들을 되돌아보자. 위대한 사람들은 좋은 습관들로 채워진 하루를 보낸다는 아주 진부한 말, 다들 한번쯤은 들어 보셨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 현대인들은 스스로 위대해지기 위해 미라클 모닝을 수행하고, 물을 챙겨 마시고, 필라테스와 같은 운동을 다니고, 주5일 지긋지긋한 회사를 나가고, 심지어는 루틴을 체크해주는 앱을 사용하기도 한다. 솔직히 내가 가진 습관들로 위대해지겠다는 희망(넷플릭스를 볼 때마다 영어 자막을 틀면 언젠가 공부에 도움이 되겠지?와 같은.)은 단 3% 정도 가지고 있지만. 어쨌든 산다는 건, 지루한 반복을 견딘다는 건, 내 작은 습관들이 무한히 다른 길로 변화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멋진 일이니까! 


2022.05.18



뉴스레터 <막차>는 술을 사랑하는(사랑했던!) 두 사람, 

버드와 이저가 매주 보내는 가벼운 음주사담 뉴스레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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