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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호박 Nov 15. 2021

슬기로운 공책 생활


오늘은 내가 사용하고 있는 공책들을 소개해 보려 한다. 먼저 내 습관을 고백하자면 직장생활 이전에는 공책이나 다이어리 한 권을 꽉 채워서 사용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반 정도 사용하면 다른 디자인의 공책이 눈에 들어왔고, 또 친구가 사용하는 공책이 더 좋아 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반도 못 채운 공책을 방구석 어딘가에 넣어 두고 새로운 공책에서 잠깐의 설렘을 느꼈다.


직장생활을 하게 되고 나서 나의 공책 생활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먼저 상사의 업무 지시를 정신없이 받아 적다가 보면 늘 공책은 통통해져 있었고 일 년을 보내기도 전에 공책 한 권을 다 채우게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돈을 쓰면서 나는 공책 생활을 더 즐기게 되었다. 한 달에 내가 쓸 수 있는 돈이 안정적으로 유지가 되니 갖고 싶었던 옷도 사고, 가방도 사고, 문구를 사면서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늘색을 좋아했던 나는 사실 노란색과 분홍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하늘색을 좋아했다고 착각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첫 번째는 엄마가 GOD의 <하늘색 풍선>을 좋아해서 초등학교 때 나도 모르게 하늘색 풍선을 들고 있는 GOD 팬이 되어 버렸고, 두 번째는 집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산 후 아빠가 처음으로 만들어준 네이버 아이디가 bluek****이었기 때문이다. 블루는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고, 내가 김 씨라서 블루 뒤에 k를 붙이고 뒤에는 생일을 넣었다. 마지막으로 초등학생 때까지는 많은 여자 친구들이 분홍색이나 노란색, 주황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나는 다른 색을 좋아하고 싶은 마음에 하늘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이야기해 왔던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니 나, 초딩 때부터 홍대병이었구나......


어쨌든 진짜 내가 아니었던 취향이 선명해지면서 나는 공책을 끝까지 사용하게 되었다. 또 점점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인생에서 기록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공책이라도 꼼꼼하게 끝까지 쓰자!라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나는 노란색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귀여운 일러스트가 들어 간 공책보다는 무늬가 없는 공책을 좋아하며, 무엇보다 줄이 없는 '무선' 노트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지금 내 곁에 남은 공책은 딱 네 권이다.


1) 공책이라고 하기엔 모호하지만 독립 후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선물 받은 아이패드를 빼먹을 수 없다. 굿노트와 프로크리에이트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회사에서는 맡고 있는 업무가 아니지만 이전 회사에서는 서점 영업/유통 관리까지 했기 때문에 매달 광고비 결산을 하는 게 아주 큰 일이었다. 그때마다 긴긴 회의를 거쳐야 했고 그럴 때 굿노트는 회의 시간의 질을 아주 높여 준 든든한 친구다. 프로크리에이트는 만쥬 언니와 함께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기본 툴만 알면 원하는 그림을 쓱쓱 그릴 수 있어서 (물론 생각만큼 멋진 그림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좋다. 열심히 연습해서 올해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직접 그리고 싶었는데. 지금부터 다시 공부해도 가능할까....?


2) 서점 굿즈 다이어리 : 무선이 아니고 줄이 있어서 어떻게 사용할까 하다가, 보러 갔던 전시회나 영화, 뮤지컬 티켓을 모으고 있다. 역시 나는 줄이 있는 공책에 글을 쓰는 건 어렵다. 티켓을 붙이는 일도 버거워서 후기는 전혀 적지 않지만 스티커는 붙인다. 스티커 최고! 아마 이 공책을 꽉 채우면 또 서점에서 책을 사고받은 굿즈를 같은 용도로 사용하게 될 것 같다.


3) 몰스킨 공책 : 불렛 저널을 하고 싶어서 구매했으나 과연 그렇게 쓰고 있을까? 물론 아주 가끔 떠오를 때 그날의 아침, 점심, 저녁 메뉴를 적곤 하지만 그것도 단 하루만 하는 일이다. 여기엔 평소에 떠오른 생각을 적기도 하고, 가끔 휘몰아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감정 쓰레기통 용도로 쓰기도 하고, 또 기억하고 싶은 일들을 적는다. 나는 보통 책을 읽다가 다시 보고 싶은 문장을 만나면 그 부분에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놓는데, "나도 이렇게 쓰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면 그 글을 그대로 따라쓰기도 한다. 그런 문장들이 담겨 있는 듬직한 공책이다. 또 P 인간이 나름대로 계획형 인간이고 싶을 때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는 없어서는 안 되는 공책이다.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일. 연말에...)


4) 아날로그 키퍼 핸디 다이어리 : 이 공책을 어쩌다 이렇게 늦게 알았을까? 뒤늦게 이 공책과 사랑에 빠졌을 때쯤엔 이미 내 친구들은 이 다이어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는 정말 잘 까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과거형인 이유는 대학교 때는 지갑을 1년에 3번, 핸드폰을 4-5번 정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 정도면 아주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내가 싫어서 일정 관리를 열심히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나는 작은 가방을 들고 다니고 싶을 때가 많았고, 그래서 늘 공책을 포기하고 아이폰 캘린더를 사용하다가 만난 것이 바로 이 아날로그 키퍼 핸디 다이어리다. 내가 가지고 있는 가방 중 제일 미니미한 가방을 들어도 이 공책과 연필 한 자루는 쏙 들어간다. 전시회 갈 때도 기억하고 싶은 작품명은 여기에 빠르게 적곤 하지. 이제 만난 지 일 년이지만 계속 함께하게 될 친구. 앞으로도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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